작은 바람
작은 바람
  • 최승옥 수필가
  • 승인 2019.05.13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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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최승옥 수필가
최승옥 수필가

 

벼르고 별러서 강원도 동해안으로 나들이를 가는 중이다. 집을 떠난다는 그 자체로 마음이 설렌다. 가는 길목마다 꽃 잔치다. 그럼에도 꽃보다 더 아름답고 기분을 들썩이게 하는 건 온 산야가 연초록 물감으로 물들고 있어서다. 초록나무 아래에서 푹 쉬고 싶은 날이다.

해마다 5월로 접어들면 가족끼리 여행을 떠났다. 올해는 다른 가족이 동행했다. 늘 가족끼리 다니다 한 가족이 함께하니 더 새롭고 든든하다. 함께한 일행도 오랜만이라 참 좋다고, 집 밖으로 나오니 숨통이 트인다며 이런저런 수다 삼매경에 빠진 만큼 자동차도 속도를 낸다.

얼마쯤 달렸을까. 우리를 태운 자동차가 빨간 신호등 앞에 섰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창문을 내려 주위를 둘러봤다.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미니, 이게 웬일인가.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로 옆 건물이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또 다른 쪽도 마찬가지였다. 저만치 보이는 산에도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온 산야가 새까맸다. 소나무도 까맣게 그을렸고 마른 잡목들도 불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간간이 보이는 집들도 타다 만 철근 조각만 휘어져 널브러져 있다. 어느 집은 아예 흔적조차 없다. 무슨 전쟁터 같았다. 정말 전쟁이 나면 저럴까? 불타서 그을리고 지붕과 기둥이 내려앉은 처참한 모습에 가슴이 먹먹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던 날, 아마도 한 달 전쯤이었을 게다. 고성에서 시작된 산불이 속초까지 번지는 모습을 뉴스를 통해 봤었다. 그저 빨리 진화되길 빌었었다. 이렇게 산야와 집들이 피해가 심했다니 상상도 어려운 현실, 주민들은 갑작스런 날벼락에 얼마나 무서웠을까. 발길 닿는 곳마다 5월의 산과 들은 온통 초록으로 물들어 있건만, 이곳을 찾은 것이 외려 죄스럽다. 저들도 불이 안 났다면 가족끼리 오순도순 바쁜 시간을 내서라도 꽃놀이를 떠날 테고, 농사꾼은 설레는 마음으로 올 농사의 그림을 그리며 마냥 좋아하겠지. 그리고 팬션이나 상인들 또한 상춘객들을 맞이하려 분주했을 것이다.

우리는 무거운 마음을 뒤로하고 목적지인 속초항으로 향했다. 거리는 조용하다. 평일이라 그런지 관광지임에도 관광객들이 눈에 띄질 않았다. 양쪽 옆으로 빈 포장마차만이 즐비하다. 그런 가운데 여기저기서 길거리 호객행위가 한창이다. 새우튀김을 손에 쥐여주며 맛이나 보란다. 일행과 함께 수산시장 가게 안으로 들어갔는데, 걱정과 달리 식당은 왁자지껄하여 무겁던 마음이 다소 편해졌다. 산불로 힘들어하는 이곳 주민들에게도 어떤 희망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해보았다.

오늘은 날씨도 화창하고 손님도 이어지니 장사할 기분이 난다고 주인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산했던 넓은 자리가 손님들로 빈자리가 없이 꽉 찼다. 어디서 관광을 왔는지 대충 보아도 관광차 대여섯 대가 온 모양이다. 시끌벅적 북새통인 식당에서 들리는 소리가 강원도의 상인들에게 만이라도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다행이다.

싱싱한 회를 먹고 식당을 나서니 바다가 눈앞에 들어왔다. 바다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파도를 앞세워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혹여 이 바람이 그날의 불길을 진두지휘했을까. 그렇다면 이 바람이 다시 사람을 불러 모으는 희망의 작은 바람이 되어 주었으면 하고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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