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감사함의 날들
오월, 감사함의 날들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19.05.07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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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초등학교 저학년 봄이었다. 신록이 짙어가는 오월 어느 아침, 일찍 잠에서 깬 나는 울고 있었다. 오늘까지 글짓기 한 편을 써야 하는 숙제를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이는 사이 새벽 산보를 나갔던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 있는 눈물을 본 아버지는 연유를 듣고 나서 짧게 한번 웃으시더니 이내 원고지와 연필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러곤 아직 아침밥상이 차려지려면 여분의 시간이 있으니 그동안 함께 숙제를 하자셨다. 우리 두 부녀는 머리를 맞대고 원고지와 씨름을 했다. 얼마나 열심히 집중을 했던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 끝에 드디어 글 한 편이 완성되었다. 평소에 책을 즐겨 읽고 쓰기를 좋아하던 아버지가 계셔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날 아침 엄마의 온기 가득한 소박한 밥상은 싸늘히 식어 버린 채 제 주인을 찾지 못했다. 나는 학교에 지각해서 담임선생님께 혼이 났다. 아버지 역시 그날따라 지인과의 중요한 약속이 있었지만 나 때문에 몇 시간이나 늦춰야 했으니 아마도 처지가 난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날을 두고두고 잊지 못할 한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그날 제출한 글짓기가 최우수상을 받아서만이 아니었다. 그날 아버지는 울고 있는 딸에게 당신의 한 시간을 내어주며 손을 잡아 힘을 불어 넣어 주셨다. 손에서 마음으로 당신의 사랑이 전해지던 순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날이 생생하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학교가 멀어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집이 시골이라 족히 반 시간 정도는 걸어나가 아슬아슬하게 새벽 첫차를 탔다. 몇몇 친구들은 아예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했지만 엄마는 벌써 집을 떠나 생활하는 딸자식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늘 아침마다 따뜻한 밥을 해 주셨다. 항상 가족 중 가장 먼저 일어나 부엌에 등불을 밝히고 쌀을 씻었다. 제철 나물을 무치고 담백하게 된장국을 끓이며 하루도 밥솥의 밥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막차를 타고 기진맥진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따뜻한 밥상을 차려놓고 책가방을 받아주셨다. 그렇게 오랜 시간 엄마의 밥상은 저마다 자식들의 삶에 소중한 밑천이 되었다.

찬바람이 쌩쌩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밥 한술을 국에 말아 후루룩 먹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뜀박질하노라면 추위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엄마가 차려낸 소박한 된장국 한 그릇에 갓 지은 밥 한 그릇이면 언제나 속은 뜨거웠고 든든했다. 그것은 아마도 어렴풋하게나마 전해진 엄마의 깊은 사랑이 추위를 몰아내지 않았나 싶다. 흔히 말하기를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했던가. 나 역시 아침마다 따뜻한 밥상으로 가족들에게 힘을 준다. 내 남편이, 내 아이가 이 밥 한 그릇으로 하루를 든든하게 시작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 밥을 푼다.

부모님이 많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깊어가는 신록만큼이나 감사함이 짙은 오월이다. 여전히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아버지를 위해 수시로 책을 사서 보내고 자식들 먹이기를 좋아하던 엄마를 위해 이젠 자식들이 먹을거리를 사서 함께 만들어 먹으며 시간을 보낸다. 늘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자식들로 자라게 해 미안함이 많았다며 자책하시지만, 하루하루 늙어가는 노년이 아닌 관록 있는 여생을 실천하는 두 분의 삶이야말로 내게는 평생 등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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