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청렴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 이원준 청주시 흥덕구 민원지적과 주무관
  • 승인 2019.05.06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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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준 청주시 흥덕구 민원지적과 주무관
이원준 청주시 흥덕구 민원지적과 주무관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청렴하지 않고 수령 노릇을 잘할 자는 없다'라고 말한다. 또 율곡 선생이 말한 `군자가 지켜야 할 아홉 가지 생각'에는 `견득사의(見得思義)'라는 말이 나온다. 이득을 보면 그것이 옳은 일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원래 우리 사회는 개천에서도 용이 나는 사회였다. `개천의 용'들은 우리 사회가 짧은 기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는 높은 이상을 향한 목적의식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국민 사이에는 강자와 가진 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공정한 사회는 청렴에서 시작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 blesse Oblige)'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인데,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됐다.

그리고 나는 우리나라 근현대사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우당 이회영 선생을 통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배우고, `청렴'의 진정한 의미를 느껴본다. 서른 살 청년 이회영이 물었다.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예순여섯 살 백발의 노인 이회영이 답했다. 그리고 그 답을 예순여섯의 `일생'으로 답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조선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명문가 삼한갑족의 후손이며, 몇 대에 걸쳐 풍족하게 먹고 살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전 재산을 처분하고 추운 겨울 압록강을 건넜다.

그가 재산을 쏟아 만주 땅에 설립한 학교는 훗날 일제강점기 무장투쟁의 거대한 씨앗이 된 `신흥무관학교'. 함께 압록강을 건너온 우당 일가의 식솔들은 독립군이 됐으며, 노비들은 나라를 잃은 순간부터 독립군이 됐다.

그리고 우당 이회영 선생을 포함한 그의 육 형제들은 대한 독립운동의 뜨거운 중심축으로서 불타올랐다.

형제와 가족 등은 굶어 죽었고, 병사하는 등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우당 이회영 선생은 일제에 타협하지 않았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비록 밀고로 인해 체포한 경찰의 고문 끝에 숨을 거뒀으나, 그의 발자취는 하나하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대한제국의 혼이 숨 쉬는 태동이었으며, 결연한 의지였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조를 지키고, 자산이 가지고 있는 목적을 위해 외길을 걸어온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삶은 `청렴'그 자체였다. 현대인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책임인 `청렴'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부귀영화와 명예보다는, 자기 자신이 마음속에 품은 긍지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에게 물었다. “한 번의 인생을 어찌할 것인가?” 그리고 훗날 공직을 마무리하며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떳떳하게 답하고 싶다. “청렴이라는`일생'으로 살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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