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원피스
빨간 원피스
  • 임현택 수필가
  • 승인 2019.05.0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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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
임현택 수필가

 

달리던 봄이 멈췄다. 나도 멈췄다. 옷장을 열고 한참을 서서 뒤적여도 도무지 입을 만한 옷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패션 감각에 몽매하다 보니 온통 검은색, 빨간색 원피스 사이에 간간이 보이는 청원피스만 있을 뿐 세련미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옷들이다.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고 옷장 속에서 이리 밀치고 저리 밀쳐지면서 세월을 먹은 옷가지들. 입어보니 군살이 삐져나오고 볼록하게 나온 배는 아무리 힘을 줘 봐도 영 옷맵시가 엉망이다. 혹시나 내년에 입겠지 하는 마음에 다시 차곡차곡 정리해 도로 걸어놓았다.

그날 오후, 몇 군데 점포를 들러 입어보고 벗기를 몇 번, 결국 쇼핑백 속에 담긴 건 또 빨간색원피스다. 중년의 허물 벗기를 하면서 애써 고른 풍성한 원피스를 던지다시피 자동차 뒷좌석으로 놓고 쇼핑타운을 빠져나오며 룸미러를 바라보니 괜스레 쓴웃음이 나온다. 눈가에 주름이 깊어지니 서글프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떠도는 부초처럼 무심한 시간을 삼켜버린 지나간 흔적 위에 무엇하나 해 놓은 것이 없는 난 어수선한 마음을 추슬러보니 더 한심스러워진다. 세월의 한복판에 나만 홀로 덩그마니 서 있는 것 같다. 소리 없이 슬그머니 찾아온 중년의 고독과 외로움에 조급해진 마음은 일상일탈을 시도했다.

프레젠테이션의 고 스티브 잡스는 숫자에 옷을 입히라 했다. 설명하고자 하는 요점을 뒷받침할 숫자를 제시한다. 사실 우린 숫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고 이해조차 무의식적으로 거부하지만, 나이라는 숫자는 떨어낸다고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몸에 꼭꼭 달라붙어 있는 나이, 그렇다면 나도 숫자에 옷을 입혀보기로 했다.

아줌마는 용감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듯 중년이란 숫자에 도전이라는 옷을 입혀보니 뜻밖에 굳센 의지와 용기가 생겼다. 조금 느리게 더디지만, 황소걸음으로 숫자에 옷을 입혀 그야말로 인생 2막장에 한 획을 그어보면서 평생교육원프로그램 하나를 신청했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면 서른은 꽃피는 삼월이고, 마흔은 열매를 맺는 시기일 것이고, 쉰은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시기가 아닐까. 그렇담 오십대의 중년은 단풍처럼 화려하게 물드는 인생의 절정이 아니던가!

중년의 길목, 사막 가운데에 샘이 솟아올라 식물이 자라는 오아시스처럼 희망이란 두 글자를 끌어안고 큰맘 먹고 장만한 빨간색원피스에 빨간색 구두를 신고 화려한 외출을 나섰다.

빨간색은 긍정적 이미지와 부정적 이미지가 공존하며 비례하는 색으로 주는 의미는 참으로 다양하다. 우리나라 궁의 기둥이 빨간색으로 칠하는 것은 부식방지차원도 있겠지만, 왕위 강력한 권위를 나타내고 악귀를 쫓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빨간색에서 가장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열정과 사랑이다. 사랑을 표시할 때 붉은 장미꽃을 선사하고, 스페인 열정적인 투우사들이 빨간 천인 ‘카포테’를 흔드는 것은 황소를 더 흥분시키기 위해서지만 소는 색맹으로 색깔을 구분하지 못한다. 때문에 이를 구경하는 군중을 더 흥분시키기 위해서다. 또한 중국인들은 권력과 부를 나타내는 붉은색을 황제의 색이라 하여 붉은 내복이나 양말도 자주 신는다고 한다. 붉은색은 진취적이고 역동적이며 개성이 뚜렷한 사람이 좋아한다는데 붉은색을 좋아하는 나의 감성지수가 업 된다.

수업 첫날, 얼핏 보아도 가장 연장자인 난 당당함은 어디로 사라지고 괜스레 낯설고 어색하다. 연신 치마단을 끄집어 내리고 신발을 신었다 벗었다 좌불안석이었지만 출석부에 커다랗게 서명을 하고 퇴실하면서 조금씩 완숙하게 중년의 삶이 익어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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