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듯 닮지 않은가 싶은데 닮았네
닮은 듯 닮지 않은가 싶은데 닮았네
  • 반영호 시인
  • 승인 2019.05.02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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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반영호 시인
반영호 시인

 

우려는 했었다. 두둑을 만들고 비닐멀칭을 했는데 감자 씨를 놓기도 전에 비닐을 뚫어놓는 놈은 발자국을 보아 고라니란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결국, 감자 싹이 나오면서 농사 외의 수고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밭 둘레에 고라니 퇴치를 위한 울타리 망을 쳤다.

고라니는 노루와 사슴의 사촌 격으로 지방에 따라서 보노루 또는 복작노루라고도 부를 만큼 노루와 많이 닮은 소목 사슴과에 속하는 온순한 동물이다. 천적인 호랑이와 늑대가 멸절하면서 개체 수가 급증했다. 노루와는 비슷하지만, 몸체가 조금 작고 송곳니가 있어 구분되지만, 아무튼 고라니 노루 사슴은 철쭉과 진달래와 영산홍이나, 나팔꽃과 메꽃의 구별처럼 헷갈린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언제자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내성적이며 오만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노천명의 시 사슴은 꼭 그의 자상 시 같다. 이 겁 많고 순한 동물이 농작물에 해를 끼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게 이율배반이다. 사실 사슴은 모습만 노루 고라니지 엘크나 순록의 축소판이다.

나를 헷갈리게 하는 것은 나무에도 있다. 전나무 잣나무 소나무가 그렇고, 진달래 철쭉 영산홍이 구분이 안 되고 나팔꽃과 메꽃이 구분이 잘 안 된다. 바닷고기도 그런데 특히 넓적한 것 중에 넙치 광어 도다리 가자미는 구별을 못 한다. 사람의 관계도 이런 경우는 종종 있다. 나와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친구가 절친일 수도 있고 잘 맞을 거란 객관적이 생각이 전혀 빗나가는 경우도 많다.

누가 뭐래도 가장 비슷한 모습은 부모·형제다. 이 시는 박지원의 연암억선형(燕巖憶先兄)으로 세상을 떠난 형님을 그리며 지었다.

我兄顔髮曾誰似 내 형님의 모습이 꼭 누구와 닮았던고/每憶先君看我兄 아버지 생각날 젠 우리 형님 보았다네//今日思兄何處見 오늘, 생각나는 형님 어디서 본단 말인가/自將巾袂映溪行 의관을 갖춰 입고 시냇가로 달려가네.

연암의 뭉클한 인간미를 엿볼 수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똑 닮았던 형, 그래서 아버지가 그리우면 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연암, 하지만 그 형님조차 이승을 하직하였다. 연암은 이제 혹 자기의 얼굴에서 형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시냇가로 부리나케 달려간다는 말이다.

연암은 글쓰기를 업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비겁하지 않게 산다는 것, 연암 시절은 미래를 담보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명을 따로 붙일 필요도 없다. <홍루몽>의 `진실은 숨고 거짓말은 남아 있다'라는 글귀만 잠시 빌리면 된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늘 `진실'보다는 `거짓'이 유행한다. 다만 `거짓'앞에, `조금'혹은 `더'라는 부사가 붙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연암의 시절이나 지금이나 아롱이다롱이요, 도찐개찐이지만, 글에서만큼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거짓'인 시절이었다. 그래 비겁하지 않게 세상을 산다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다. 나는 글을 쓸 때면 박지원의 말을 종종 되뇌곤 한다. 다른 듯하면서 같고, 같은 듯하면서도 다르게 쓰라는 말이다.

사람 사는 세상은 어떤가. 내 삶이나 이웃들의 삶이 아마 거기서 거기지 싶다. 그런데도 뉴스를 접해보면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많고도 많다. 아무리 다른 삶을 살기로 서니 하루 세끼 먹고 입고 자는 게 뭐 그리 크게 다르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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