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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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19.04.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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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그 모습이 어른거린다. 어느 한가한 날, 교외에 나섰다가 시내버스를 타게 되면서다. 장날이 아니어서인지 차 안은 넉넉했고 승객들은 거의가 나이 지긋한 분들이셨다. 그중 남자 어르신 한 분이 차창에 기대어 앉아 계신다. 스치는 들녘과 사람들의 모습이 그림처럼 평화롭다. 모처럼의 이런 외출이 행복해서 빈자리에 앉는 것도 마다하고 창밖을 바라본다.

생각해보면 여느 일이건만 자꾸 눈길이 간다. 그 어르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열쇠꾸러미 때문이다. 아마도 농사를 짓는 분 같은데 비슷한 크기의 열쇠들이 꽤나 촘촘히 엮어져 있지 않은가. 곳간 열쇠일까, 아니면 각 방의 열쇠일까,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쇠의 주인인 그분이 왠지 큰 부호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왜 저리 무겁게 허리춤에 차고 다니시는 걸까. 중요한 것만 챙기고 그냥 적당히 집에 두고 나오시면 가벼울 텐데 하는 염려마저 생겼다. 하지만,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메우는 것이었다. 그분의 울타리에 있는 모든 것이 소중하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물건이든 그 무엇이든 지켜야 한다는 삶에 대한 일념의 습관은 아닐는지 궁금했다.

엉뚱한 상상은 곧 따뜻함으로 이어졌다. 하나하나의 열쇠에 대한 애착이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또 나이만큼이나 지켜야 할 어떤 것들이 주변에 가득해 있지 싶었다. 새로운 시각의 인간애를 보는 기분이었다. 한편, 열고 닫는 유형의 물질보다 가슴속에 지닌 여러 문을 오로지 자신만이 열 수 있도록 고집하며 사는 또 다른 특권인 듯도 했다. 그 역할에 오늘도 저리 꾸러미열쇠를 지니고 외출을 하신 걸까.

그날 이후 내가 지닌 열쇠를 들춰 보았다. 간단하다. 몇 개 되지 않는다. 내 경우 그 정도에 그치기까지 무게들을 고려했지 싶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마음의 열쇠꾸러미를 갈피갈피 살펴본다. 다시 생각하고 싶은 것은 그동안 조금이라도 무거운 마음이 있었다면 덜어내기 위한 열쇠를 찾아야겠다는 각오를 한다. 열려 있는 마음의 문을 갖고 살 때 굳이 번거로운 잠금장치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지나간 생의 한복판에서부터 원이 그려진다. 조금씩 회전하면서 열리는 문들 사이로 내면의 그림자가 보인다. 밝아지는 중이다. 도적질 당해도 괜찮을 보물들로 쌓여가고 있다. 세상을 온통 두려운 벽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다.

눈을 감는다. 그분의 보물창고에는 무엇이 있을까. 애써 거둔 곡식일까, 아니면 아끼며 지내온 구석구석 살림살이들일까. 무엇보다도 삶이 소중하다는 짐작과 함께 검게 그을린 그 얼굴을 오랫동안 지우지 못했다. 허리춤에 달린 열쇠꾸러미가 자꾸만 값져 보였다. 짧은 단면이었지만 흰 머리 위로 내려앉은 한 사람의 인생을 열쇠가 단단히 지켜주는 듯해서다.

이제 내 마음의 열쇠를 조심스레 점검한다. 때에 따라서는 자유롭고 열쇠가 필요 없는 의식의 날개를 달고 사는 것도 괜찮지 싶다. 비우고 비워서 가벼운 영혼에 이른다면 훨씬 풍요로운 삶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깐 동안 누군가의 겉모습을 엿본 기분은 지루하지 않을 만큼의 잔잔한 삽화가 되어 가슴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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