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주년 전시회와 영원한 청년 윤봉길
100주년 전시회와 영원한 청년 윤봉길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9.04.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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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서영아! 여기 와서 사진 찍자!”한 초등학생이 함께 관람을 온 어머니의 요청에 권총과 수류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엄숙한 표정으로 포즈를 잡는다. 목에는 선서문을 걸고 자신이 독립투사라도 된 듯이! 윤봉길 의사의 흉내를 내면서 자못 진지한 모습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맞이해 충북교육문화원에서 `100년의 시간, 기억, 그리고 내일'이라는 주제로 의미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곳 2층 예봄갤러리에는 독립기념관에서 제공받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사진전을 비롯해 광복회 충북지부에서 3.1운동과 독립운동 임시정부 관련 사진, 영상관에는 `우리는 그를 찾아야 한다.'는 안중근의사의 묘소 찾기 영상 자료가 상영되고 있다.

아울러 학생들이 전시장에 와서 단순한 관람이 아니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제공되고 있다. `태극기 바람개비 만들기'와 `희망 쪽지 달기', 그리고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체험 행사가 바로 `윤봉길 의사 포토존'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것이다. 1931년 윤봉길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쓴 선서문을 목에 걸고 권총과 수류탄을 들고 태극이 앞에서 촬영한 기념사진을 똑같이 흉내를 내어 권총과 수류탄을 들고 선서문을 목에 걸고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윤봉길 의사를 홍구공원 의거로 인해 마치 무장 폭력 투쟁의 대명사처럼 알고 있지만 사실은 다르다. 그는 17세 되던 어느 날 서당에서 공부할 때 공동묘지에서 여러 묘표(墓表)를 뽑아들고 선친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한 무지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이때 의사는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공공의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 후 19세의 윤 의사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직접 공부방을 설치해 주변의 아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던 선각자요 민족의 지도자였다. 하지만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한 윤 의사는 23세 되던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가족을 고향에 두고 중국 망명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나 의열투쟁에 뜻을 모으고 한인애국단에 가입해 김구와 함께 홍구공원 거사를 계획하고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이날이 1932년 4월 29일이다.

윤 의사의 의거 이후 중국의 한인 독립운동 지원과 임시정부의 활성화 등 이후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5세라는 짧지만 강렬했던 윤 의사의 생애를 통해 애국 애족의 정신과 그가 꿈꾸었던 나라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한다.

필자도 이번 전시회에 작은 힘을 보태게 되어 영광스럽다. 부족한 솜씨지만 학생들의 역사교육 자료로 활용하려고 방학기간 동안 서각으로 새긴 독립운동가 34분의 얼굴이 전시돼 가슴 뿌듯하다.

30일까지 전시되는 이곳에 가면 윤봉길 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날 수 있다. 가족이 함께 가서 우리 역사를 가슴으로 담아갈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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