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서 제일 누각 `청풍 한벽루'
호서 제일 누각 `청풍 한벽루'
  • 김형래 강동대학교 교수
  • 승인 2019.04.28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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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김형래 강동대학교 교수
김형래 강동대학교 교수

 

조선 초 정도전은 충청도를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이라 평하였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 뜻으로 `결백하고 온건한 성격'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이 말은 충청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이곳 사람들의 온화한 성품을 아우른다. 충청도에서도 충북 제천은 청풍면과 청풍호반, 월악산을 품고 있어 청풍명월의 본향으로 일컬어진다.

청풍이란 말도 청풍면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의 청풍면은 충주댐 건설로 대부분 물속으로 사라졌다. 조선시대만 해도 남한강 물길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청풍지역은 산세 또한 수려하고 공기가 맑고 사람이 생활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조선 성종 때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이승소(李承召, 1422~1484)는 청풍을 “호남(湖南)의 50성(城)을 두루 다녀 보았지만, 경치 좋은 땅 오늘에야 그윽한 정취에 맞네, 백 척의 푸른 누각 바람을 내려다보아 산뜻하고, 푸른 벽 천 길이나 쇠를 깎아 만든 듯싶다. 산이 좋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납극(蠟 )을 생각하게 하고, 강이 맑으니 나를 불러서 먼지 낀 갓끈을 씻게 한다. 도원(桃源)이 반드시 인간 세상 아닌 것이 아니니, 고기잡이 늙은이를 따라 이생을 보내려 한다.”라고 노래했다. 이승소가 보았던 조선시대의 청풍은 도연명이 말하는 무릉도원처럼 아름다운 경치였고 살고 싶은 곳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도 현대인처럼 유람을 좋아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지만, 말이나 배를 타거나 걸어서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녔다. 사대부들이 남긴 기록 중에는 여행기가 적지 않고, 빼어나게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한 뒤 지은 시도 많다.

충청도 지역에서 가장 많은 풍류객이 드나들면서 아름다운 경관을 앞다투어 노래한 곳은 청풍지역이다. 특히 한벽루(寒碧樓)는 시인 묵객들의 시작(詩作)이 많이 전해지는 시(詩) 박물관이다.

한벽루는 고려 충숙왕 4년(1317) 당시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이다. 원래 남한강변에 있었으나, 지금은 충주댐 건설로 부근의 다른 문화재들과 함께 청풍문화재 단지로 옮겨져 복원되었다. 남한강을 바라보고 있던 한벽루가 지금은 청풍호를 바라보게 되었다.

한벽루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으로서 비교적 큰 건물이다. 측면에는 본루에 오르도록 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독특한 계단형 익랑채를 달았다. 남원의 광한루,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조선 3대 명루라 불릴 정도로 빼어난 경관 요소와 입지적 적절성을 갖춘 정자 건축의 걸작이었다.

한벽루는 객관에 딸린 누각이면서도 주변의 산수가 빼어났기 때문에 고려의 주열, 조선의 서거정, 하륜, 이승소, 노수신, 김정, 이황, 유성룡, 김득신, 정약용, 권상하, 김창협 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문사들이 탐방하여 시문과 기(記)를 남겼다. 이들 문사와 시인들은 하나같이 산과 물이 맑고 차고 푸르다는 것을 노래했다. 맑고 차고 푸른 것이 바로 `한벽(寒碧)'이고, 맑은 바람은 `청풍(淸風)'이다. 맑은 바람은 산에서 불어오고, 차고 맑고 푸른 것은 물이므로, `청풍한벽'이라는 것은 곧 산수를 함께 이르는 말이다. 산수는 당시 선비들에게 있어서 도는 자연의 법칙을 본받아야 한다는 도법자연(道法自然)의 근원을 의미했으므로, 청풍 한벽루라는 이름에는 산수 자연의 도를 즐겼던 당시 사람들의 자연관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맑은 바람 밝은 달” - 청풍명월(淸風明月)로 대변되는 충청도의 하늘이 요즘 미세먼지로 몸살을 앓고 있다. 조만간 조선의 선비들이 앞다퉈 찾던 아름다운 자연과 온화한 성품의 사람들이 어우러진 살기 좋은 고장의 명성을 되찾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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