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곧 종합 예술
삶은 곧 종합 예술
  •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19.04.25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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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오랜 지인이 그림을 그리는 전업 작가다. 그 지인 덕분에 전시회장을 찾아서 그림을 감상할 기회가 종종 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작품을 출전해 수상하고 제자들을 키워내는 중견 화가들과 직접 교류하며 그들의 근황에 대해서도 자주 듣게 된다. 그러다 보니 중견 화가들의 공통된 고민 중 하나가 창조적이고 발전적으로 화풍의 변화를 모색하는 일이란 사실도 알게 됐다. 구상 화가든 비구상 화가든 크게 다르지 않다.

유화, 수묵화, 풍경화, 추상화할 것 없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화폭 위에 형상화한 뒤, 작품에 투영된 그 자신의 마음을 타인들과 나누기 위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창조적이고 발전적인 화풍의 변화란 무엇일까? 단지 눈에 보이는 형태론적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마음이 보다 창조적으로 업그레이드 돼야만 비로소 화풍이 발전적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화풍을 바꾸고 싶은 욕심이나, 바꿔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에 애써 작위적으로 바꾼 것이라면, 겉옷만 바꾸어 입었을 뿐 옷 속의 사람은 그대로인 것과 무엇이 다를까? 결국 작품이 보다 창조적으로 업그레이드 됐다는 것은, 작가가 어떠한 주의 주장 및 색깔에도 물들지 않은 내면의 순수한 생명력을 보다 더 확연하고 온전하게 드러내는 능력이 향상됐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때 묻지 않은 내면의 생명력을 온전하게 드러낸다는 것은, 화가의 작업 의지가 생명 본원인 순수의식에서 저절로 발(發)해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때 묻지 않는 순수한 생명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투영된 작품이라면, 모든 사람들의 생명 에너지를 공명시키며 세계적인 명화의 반열에 오를 수밖에 없다. 그림뿐만이 아니라, 음악이든 춤이든 모든 예술은 예술가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서 대중에게 전달하고 나누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다 같다. 시, 소설, 철학, 종교도 마찬가지다. 예술가니 종교인이니 할 것 없이 그의 마음이 우주의식인 순수한 생명의 본원에서 온전히 발해지는지, 아닌지가 중요할 뿐이다. 그 에너지의 순도와 크기가 바로 작품성이고 진정성이고 예술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에 있어서 테크닉 내지 스킬은 바로 예술가의 마음을 표현하는 2차적 수단이고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어로 자기 생각을 말할 때, 일정한 어휘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말을 몰라도 진실은 절로 통하는 것처럼, 비구상 작품일지라도 작가의 생명에너지가 내재해 있다면, 뚜렷한 형상을 띄는 구상작품들보다 더 확실하게 작가의 마음이 전달된다. 반면 어휘가 풍부하고 문법과 작문 실력 등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내면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그럴듯한 말들은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감동을 줄 수 없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단어를 나열했다고 해도, 그것은 시가 아니다. 그림과 시뿐만이 아니다. 매 순간순간 시간과 공간에 그려지는 3차원의 종합예술인 우리 삶 또한 다르지 않다. 내면의 진심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말과 행동으로 쓰여 지고 색칠해지는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오직 왜곡되고 뒤틀리지 않은 순수 의식에서 발현되는 삶만이 행복을 담보할 수 있다. 관념의 노예가 펼치는 삶은 꼭두각시놀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어떤 말과 행동으로 인생을 색칠하고 있는가? 내면의 순수 의식에서, 고요하고 담연한 가운데 저절로 용솟음치는 말과 행동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지금 이 순간의 시간과 공간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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