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丹齋) 신채호
단재(丹齋) 신채호
  • 김규섭 청주시문화산업팀장
  • 승인 2019.04.2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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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규섭 청주시문화산업팀장
김규섭 청주시문화산업팀장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 고령신씨의 집성촌이 있고 단재 선생의 유허지가 있는 곳이다. 여덟 살에 이곳으로 이사와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며 뛰어놀았던 곳. 집안은 가난했으나 아버지가 태어난 고향, 친구들이 있었기에 마음만은 푸근하지 않았을까.

유허지에 도착하니 산새들의 울음소리만 여기저기서 들려올 뿐 사람들은 보이질 않는다. 오늘은 내가 처음 방문객인 모양이다. 들판 너머에 덩그러니 서 있는 유허비가 불어오는 바람에 더욱 쓸쓸해 보인다. 책을 읽는 단재선생 옆에서 쪽진 머리를 하고 단아하게 서 있는 여인, 박자혜 여사가 아닌가. 가난에 시달려 삶은 비록 궁핍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 얼마나 행복했을까.

외삼문을 지나 사당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이마에 검은 눈썹, 둥그런 눈매에 길게 기른 콧수염, 파란색 두루마리를 입고 다소곳이 의자에 앉아있는 단재선생의 영정이 눈에 들어왔다. 언론인이면서 민족주의자, 역사가이면서 아나키스트였던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다양한 경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에 독립운동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언론으로도 민족주의 독립운동으로도 나라를 찾을 수 없어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까지 경도되었던 것이 단재의 삶이었다.

나라가 암울했던 시절, 수많은 사람이 해외에서 이 땅에서 나라를 지켰다. 그러나 단재처럼 이론과 실천을 겸비했던 지사는 흔치 않았다. 민족주의자들이 준비론과 외교론을 외치며 사대굴욕외교를 할 때 단재선생은 단호히 무력혁명을 주장했다. 제국주의자들의 횡포에 눈 한번 크게 뜨지 못하는 유약한 민족주의자들의 틈바구니에서 단재는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하고야 마는 강직한 사람이었다.

1928년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서 활동하던 그는 군자금을 마련하려 대만에 갔다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공판과정에서 일본 재판관이 사기행각은 나쁜 짓이 아니냐고 다그쳐 묻자 “우리나라가 나라를 되찾으려고 하는 일들은 모두가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할지라도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없다.”고 말했다. 얼마나 용기 있고 기개 넘치는 대답인가.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단재는 하루가 다르게 병색이 깊어갔다. 친지들이 일가뻘 되는 한 부호를 설득하여 그의 보증 아래 가석방을 시키려 하였으나 단재는 그가 친일파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친일파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민족정신을 꺾는 일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936년 2월 21일, 단재는 모진 고문 끝에 뇌일혈과 동상, 영양실조와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민족의 큰 별은 그렇게 사라졌다.

몇 해 전, 단재선생이 국적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언론에서 접했다. 살아서도 국적이 없었고 죽어서도 국적이 없었던 사람. 서거한 지 100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국적을 회복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모두 역사 앞에 부끄러운 후손들이다. 그는 대한민국을 뜨겁게 사랑했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한 번도 절개를 굽힌 적이 없었다. 사당 앞에 홀로 서서 한참 동안을 바라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다가와 말을 걸 것만 같았다. 사당 뒤편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 묘소에 오르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외치는 선생의 사자후가 들려오는 듯하다.

단재는 언론인으로 역사학자로 뛰어난 분이었다. 그리고 민족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일생을 바쳤던 이 시대의 큰 스승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뛰어났던 것은 피 끓는 애국심과 민족의식,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이었다. 동북공정으로 중국의 역사왜곡이 끊이질 않는 지금 그의 민족정신이 얼마나 정결하고 숭고했는지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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