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가 존경스럽다
내 남자가 존경스럽다
  • 전영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9.04.1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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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전영순 문학평론가
전영순 문학평론가

 

조각 지식과 욕망의 잣대로 세상을 스캔하는 시대, 인간의 생존 법칙은 참으로 간단명료해졌다. “나는 있고 너는 없다” 주의이다. 신본주의, 인본주의, 개인주의니 하는 철학의 계절은 어느덧 저물어 이기주의로 지평을 넓혀가는 현실 앞에 단애가 무색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정부(正否)의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것은 세상 탓이 아니다. 내 정신과 마음의 눈이 멀어 길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제 너나 할 것 없이 눈과 귀를 씻고 세상을 읽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조각난 지식도 아귀를 잘 맞추고, 욕망도 창조적으로 이로운데 쓰다면 모난 것들이 둥글어지지 않을까.

살다 보면 정말 예측불허의 사람이나 사건을 만나 당황할 때가 있다. 한 번 만나고 다시는 안 만나도 좋다는 막가파를 만나면 눈살이 찌부러진다. 그래도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의 진미는 나타나기 마련이다. 아무리 혼탁한 세상이라도 세상은 보석 같은 분들이 드물게나마 자리하고 있어 균형을 잡아간다. 정(正)의 파장은 세상의 길라잡이가 된다. 내게도 훌륭한 스승이 몇 분 계셔서 들뜨기 쉬운 마음을 억누르고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하마터면 영원히 미워할 뻔한 사람도 있다. 내게 가까이 있으면서 늘 아프게 했던 사람, 어느 시절을 생각하면 아직도 멍울이 쿵쾅거린다. 내 파란 꿈을 멍으로 물들였던 그 사람이 요즘은 존경스러워 보인다.

옆에 있어야 할 자리가 늘 비어 있었다. 그 공터에서는 휑한 바람이 잦았다. 자리의 주인공은 밤낮없이 연구실과 온실을 오가며 혼신을 쏟을 뿐, 가족과 가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도 그 주인공을 생각하면 콧등에는 땀방울이 수포처럼 피어 김이 오르고, 겨드랑이에서는 갓난아이의 대변처럼 시큼한 냄새가 난다.

그런 주인공을 내 것이 아니라고 내려놓기까지는 이십 년이 걸렸다. 그 주인공은 아이 셋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연구에 열정을 쏟았으나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가슴은 식어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의 공허는 지구보다 훨씬 부풀어 펑하고 터질 때가 잦았다. 19년 만에 가족사진을 찍는 날, 눈물이 쏟아졌다.

떠돌이로 해외 생활하면서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해야 할 영순위가 가족사진 찍는 것이었다. 학기 초 교실 뒤에 붙여놓으려고 학교에서 가족사진을 가져오라고 했다. 아빠가 나온 가족사진 한 장이 없었다. 어떤 사진을 보내야 하나 하고 고민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아이 아빠는 아이들이 잠든 한밤중에 집에 왔다가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연구실로 갔다. 잠시도 눈을 떼어서는 안 될 실험이기에 시간과 싸워야 한다며 혼이 나간 사람처럼 살았다.

그러니 거짓말같이 사진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빠가 안 계시느냐고 조심스레 물은 적도 있다. 어느덧 아이들이 성장해 집을 떠났지만, 그 남자는 여전히 바쁘다.

며칠 전, 처음으로 그 남자에게 칭찬했다.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에서 그 남자에게 내려진 우수논문상을 유망한 젊은 연구자에게 주라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나는 아주 잘한 일이라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예전에 세계과학기술인명대사전과 캐나다과학인상 등을 거절한 적도 있다. 상이란 그 분야에서 정말 우수한 인재가 받아야 한다며 거절했다.

얼마 전 정부에서 주도하는 신육종기술 실용화사업단에 얼토당토않은 사업단장이 선정돼 개탄하는 모습을 봤다. 한국농업의 미래가 걱정된다며 연구자들의 우려도 크다. 선정 결과도 석연치 않다. 논밭을 갈아엎는 현실 앞에 수백억이 왔다 갔다 하는 농업정책이 봐주기식으로 선정되었다면 우리의 농업정책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관계자에게 묻고 싶다. 인간의 생존 문제가 걸린 농업정책에 땀 흘리지 않고 책상에 앉아 장난질하는 그대여 삽을 들고 들로 나가라. 요즘은 땅심 믿고 외눈박이 인생을 사는 내 남자가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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