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만끽하세요
봄을 만끽하세요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19.04.1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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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어느새 사월하고도 중순입니다. 봄이 왔는가했는데 어느결에 봄의 한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봄이 되면 이것저것 해볼 요량이었는데 이도 저도 아니게 봄날의 절반을 날려버렸으니 오호통재입니다. 생각과 걸음걸이는 나날이 느려 가는데 문명의 변화와 세월의 속도는 나날이 빨라지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니 바동거린다고 될 일도 아니어서 그러려니 하며 삽니다. 어쨌거나 지난봄은 몹시 고단했습니다. 아니 참으로 잔인했습니다. 한반도를 뒤덮은 초미세먼지와 4월 4일 발생한 강원도 산불과 청년실업의 증가와 정치권의 이전투구로 편할 날이 없었으니까요.

바깥출입은 물론 심호흡조차 마음껏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먼지가 극심해 민초들의 불편과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강풍을 타고 번진 강원도 산불은 축구장 면적의 800배가 넘는 울창한 수목과 주민의 삶터를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는 청년 백수들이 늘어나는데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줘야 할 정치권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정쟁에만 매몰되어 있으니 나오는 건 쌍욕과 한숨뿐입니다.

각설하고 사월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해 인구에 회자하는 미국 시인 T. S. Eliot(194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입니다. 그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황무지'라는 시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나라 시인들도 민주주의를 부르짖다 공권력의 총칼에 산화한 4.19의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면서 사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한 바 있는데,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참사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면서 사월이 다시 잔인한 달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4,19혁명과 세월호참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새삼 민주주의와 안전에 대한 소중함과 절대성을 재인식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추모합니다. 필자가 보는 또 다른 사월의 잔인함은 꽃들의 낙화와 예수님의 수난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사월에는 많은 꽃이 피었다가 집니다. 뭇사람을 경탄케 하는 벚꽃이 그렇고 산수유, 백목련, 개나리, 진달래, 조팝나무꽃 등이 그렇습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개화한 아름다운 꽃들의 낙화는 잔인함의 극치입니다.

만개한 지 열흘이 채 못 되어 꽃비처럼 떨어지는 벚꽃의 잔해를 보노라면 눈물이 납니다. 깨끗하고 고결하게 피었다가 누렇게 변색되어 떨어지는 목련꽃의 낙화는 인생의 낙화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저밉니다. 인생무상을 느낄 정도로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수난이 사월 이맘때에 있었습니다. 하여 사월은 잔인한 달이자 부활의 달이기도 합니다. 미세먼지 때문에, 산불 때문에, 빡빡한 살림살이 때문에 봄의 정취를 느낄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 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구나'라고 한탄하고 계십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누구에게나 오늘이,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젊을 때입니다. 어제 오후에 친구와 양성산에 가서 벚꽃과 개나리와 진달래의 향연을 보고 왔습니다. 꽃비 되어 떨어진 벚꽃을 밟으며 청춘의 낙조를 떠올렸습니다.

봄은 다시 오지만 한 번 간 청춘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봄바람이 나도 좋고, 봄을 타도 좋습니다. 봄을 만끽하세요. 물오른 나무처럼 푸르게.

/시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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