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슬픔 - 세월호 5주기에 부쳐
살아남은 자의 슬픔 - 세월호 5주기에 부쳐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4.1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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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표현은 지극히 퇴폐적이며 위로의 말로는 적절하지 않다. 적어도 `세월호 이야기는 이제 좀 지겹지 않아?'라며 동의를 구하는 듯 의심하는 세태에서는 더욱 그렇다.

소설가 박일문이 브레히트의 시와 같은 제목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을 발표한 것은 벌써 27년 전인 1992년. 그 해에 그는 이 소설로 제16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다.

세월호가 무너진 지 5년째 되는 날 새벽, 혼란의 밤을 지새우던 나는 책장에서 잊혀 진 책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꺼내 들었다. 세월의 더께가 잔뜩 묻어 있는 책은 누렇게 빛이 바랬으되, 단어와 문장들은 여전히 서늘하다.

「담배에 불을 붙이다 보면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습니다.

쓴 커피를 마시다 보면 늙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꽃 같은 격정과 얼음 같은 고독 사이에 스물은 흘렀습니다.

이데아가 있었고 이데올로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공기 속으로, 어떤 것은 땅밑으로 사라졌습니다.」

소설가 박일문은 이 책 말미에 “-언어를 다루는 고독한 이 들께 이 짧은 헌사를 바칩니다.”며 작가의 말을 남겼다.

박일문의 문장은 민주와 반민주, 독재와 반독재의 치열함이 거리를 뒤덮고 목숨의 경계마저 함부로 위협하던 80년대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서러움을 한탄한다. 교정을 벗어나 거리에서 감옥으로, 군대로. 심지어는 생명마저도 기꺼이 내던져야 했던 젊음과, 그 길로 다가가지 못했던 비굴함의 극단에서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죽음에 대한 부채의식이 절절하다.

불과 40년 전에도 그랬고, 오늘 겨우 5주기를 맞은 세월호에 대해서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과 `기억에서 지워버려야 할 것' 사이에서의 충돌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직 `살아남아'끝끝내 `슬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사람들로 인해 우리가 살아남은 것임을 늘 기억하지 못한다. 수학여행 길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자식에 대한 한으로 애(창자)가 타버릴 지경이 아니더라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외면할 수는 없다.

감추려, 숨기려 들지 말고 지금이라도 세월호로 인해 무너져 내린 하늘을 다시 떠 바칠 `진실'에 대해 다가 섦을 방해하거나 폄훼하고 질시하는 짐승 같은 삶은 정말 골라내는 세상을 만나고 싶다.

절치(切齒), 이를 갈고, 부심(腐心), 가슴에 새기는 일은 조국과 민족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대통령이 언급한 대로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일제 식민지, 6·25로 이어지는 비극의 역사는 절치부심하지 못한 우리 모두의 탓이다.

일본은 WTO(세계무역기구) 상소기구가 우리나라의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조치가 타당하다는 판결에도 불구하고 억지를 부리거나 위안부 및 강제징용문제에 반성을 외면한다, 이는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친일파가 있으며 이를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역사적 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 아닌가.

우리는 어느 순간, 어느 관계이거나 `중재자'이거나 `촉진자' 또는 `당사자'가운데 단 한가지의 역할에 머무를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각각의 상황에 맞춰 세월호의 슬픔을 위로하면서 안정을 찾게 하는 촉진자, 감추려드는 세력을 들쑤셔 진실을 말하게 하는 중재자, 고통에 손 내미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 평화는 세월호와 한반도 모두에 골고루 퍼져야 한다. 세월호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가 되어야 할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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