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봄바람
  • 임현택 수필가
  • 승인 2019.04.1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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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
임현택 수필가

 

봄볕 좋은 날, 고인쇄박물관 뜰을 거북이걸음으로 무장무장 걸어본다. 화투연이 앞다투어 겨우내 잉태했던 봄을 해산하느라 산고를 치르는 중이다. 담 아래 땡땡한 젖가슴처럼 꽃망울을 움켜쥔 영산홍은 손끝만 대도 금방 터질 듯 여민 앞섶을 풀어헤치고 있다. 코끝이 시리다. 슬금슬금 일기 시작한 봄바람은 제법 잔가지를 세차게 흔들어댄다.

그때도 그랬다. 면사포 속에 가려진 수줍은 신부의 미소처럼 반쯤 핀 모습이 절정인 봄꽃나무들, 얼마나 숨 막히게 피려는지 응달에서 아기 볼처럼 통통한 붉은 꽃망울을 잔뜩 매단 꽃나무들이 봄볕 아래 뜨겁게 가슴속을 헤집던 봄날, 귀촌하면서 야심 차게 농사일을 하겠다고 도전을 했다. 비닐하우스 온상에서 모종을 재배할 요량으로 이른 아침부터 여러 집이 품앗이로 비닐하우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전날, 하우스골조 설치는 물론 고랑을 파 비닐 끝을 묻을 흙도 미리 준비를 했다.

비닐하우스 제작은 활대를 중심축으로 양쪽에서 비닐을 잡아당겨 펼치면서 중간에서 중심을 잡아 조금씩 펴 주고, 발 빠르게 하우스활대를 덮고 양쪽 끝을 흙으로 꾹꾹 눌러주어야 제대로 온상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세상사 어디 뜻대로 되겠는가. 바람이 없는 이른 아침에 작업해도 능숙하지 못하는데, 서서히 일기 시작한 봄바람은 서툴고 어색한 초보농사꾼을 가만두질 않았다. 슬며시 다가온 바람은 급물살을 타고 밀려오는 파도처럼 비닐하우스로 달려오더니 이내 날개를 쫙 편 독수리가 발톱으로 먹이를 낚아채듯 양쪽 비닐을 휘감아 공중으로 낚아채 허공에서 펄럭인다. 여러 명이 잡고 있어도 봄바람은 얕잡아 보기라도 하듯 더 높이 펄럭였다.

마치 빠른 박을 타고 돌며 허공에 흩뿌리는 선비의 흰 도포자락이 허공에 휘날리는 학춤처럼 덩실덩실 신명난 춤사위가 한판 벌어진다. 흰 도포자락이 너울거리는 양손을 번쩍 들고 한 발 들고 서 있는 사위가 안간힘을 쓰며 잡아당기느라 허공에 내젓는 팔과 겅중겅중 뛰면서 비닐을 꾹꾹 누르는 모양이 학과 흡사했다. 그렇게 봄바람도 우리도 텃밭에서 한바탕 춤판이 벌어졌다.

발뒤꿈치로 누르고 또 한 발 내딛고 허공에 뿌려지던 흰 도포자락, 고고한 학이 천천히 날개를 폈다가 오므려 느리게 끝맺음하듯, 흩날리던 비닐도 양쪽 옆에 흙으로 꾹꾹 눌러 제대로 된 비닐하우스가 만들어졌다. 벌써 온상 속은 뿌옇게 김이 서려지고 있다. 툭 치면 금방이라도 빗방울처럼 작은 물방울이 데구루루 흘러내릴 것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물방울들. 봄비가 많이 내리면 그 해는 풍년이라는데 온상 속에 봄비처럼 촉촉하게 맺혀 있는 물방울들은 풍년을 기약하기라도 하듯 점점 더 뿌옇게 물들인다.

마을 여기저기 하우스가 만들어진다. 마지막집 하우스 안에서 동네 사람들은 옹기종기 쪼그리고 앉아 미나리부침과 막걸리로 고단함을 덜어내는 소소한 잔치를 벌인다. 나무 송판 위에 주안상을 펼쳐놓고 묵은지를 손으로 쭉 찢어 부침 위에 얹어 서로 입에 넣어주면서 함박웃음이 터진다.

봄볕이 고요하다. 어깨 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밟고 귀촌 때를 떠올리며 박물관을 거닌다. 온상에서 서로 키 재기 하듯 삐죽삐죽 올라오던 모종들, 구석진 자리엔 씨앗껍질을 뒤집어쓰고 겨우 올라오던 새순들이 눈에 선하다. 흰 머리가 많아지면 가까운 기억은 잊어버리고 먼 옛날 기억만 생생하다는데 오늘, 봄바람에 몸을 맡긴 체 상념 속으로 빠져든다. 봄바람이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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