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목욕탕
우리 동네 목욕탕
  •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9.04.1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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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지난겨울, 딸아이와 함께 동네 목욕탕엘 갔다. 여러 해 이 동네에 살면서 매일 지나는 길목에 있는 이 목욕탕에 처음 간 것이다. 탈의실로 들어가니 훈훈한 곰팡내가 내 긴장의 촉수 한 가닥을 건드리고 자극을 받은 촉수 가닥들이 나와 사방을 살핀다. 탈의를 하고 목욕탕으로 들어가자 첫 손님을 맞이하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목욕도구들, 보송보송 말라있는 따뜻한 바닥, 뜨겁고 투명하고 맑게 준비되어 있는 온탕물, 내 촉수들이 조용해졌다.

타산이 맞을까 하는 내 걱정도 잠시, 뒤이어 하나 둘 들어오는 손님들은 서로 아는 사이인 듯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길게 안부를 나누며 어느새 제법 북적이게 되었다. 목욕탕집 주인 여자가 들어와 이것저것 정리하고 다니며 여럿에게 인사를 한다. 처음 온 손님인 나와 딸에게도 인사를 하고 자꾸 눈길을 준다. 목욕을 마치자 내 등에 로션을 발라주기까지 했다.

두 번째 갔을 때였다. 역시 이른 새벽, 주인 여자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리는데,

“어머님, 조금 있다 들어가시면 돼요.”

다정한 목소리다. 이곳이 따뜻하니, 고부가 함께 여기에서 잔 건가? 오륙십이 넘은 나이 같은데 목소리는 착한 새댁 같았다. 손님들에게 두루두루 스스럼없이 대하는 모습은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저런 품성을 가진 며느리와 함께 사는 이 목욕탕집은 복이 있구나 싶었다.

잠시 후 주인 여자가 `어머님'을 모시고 목욕탕에 들어왔다. 한눈에도 `어머님'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아이 같은 얼굴이다. 당황함도 긴장감도 어떤 감정도 나타나지 않는 표정이다. 손을 드세요, 뒤돌아 보세요. 주인 여자의 커다란 목소리 때문에 목욕탕 손님 모두가 둘의 행동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주인 여자와 `어머님'이 온탕 안으로 들어가 앉자 주위가 조용해졌다.

잠시 후 주인 여자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소리쳤다.

“여기 등 안 미신 분 있슈?”

손님 하나하나 물어보기까지 하더니 눈에 들어온 사람, 눈이 마주친 사람이 있었나 보다.

“내 여기 어머님 때문에 갈 수 없으니, 이리루 와유.”

한 분이 온탕 가까이 가니 주인 여자가 상체를 온탕 밖으로 빼서 등을 밀어주었다.

나는 딸아이와 서로 등을 밀었다. 그런데 주인 여자가 언제 나타났는지, 딸아이의 손에 힘이 하나도 없다며 기어코 내 등을 밀어주고 갔다. 고작 두 번째인데, 동네 목욕탕에서 일어나는 일은 당황스럽고도 재미있었다.

`어머님'의 비밀은 그다음 알게 되었다. 목욕을 마치고 탈의실로 나왔을 때 주인 여자와 때밀이 여자가 함께 `어머님'의 온몸에 로션을 바르고, 아이를 보살피듯이 내복과 옷을 입히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할아버지도 목욕 다 했다고, 곧 할아버지를 만나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나왔다는 전갈이 오고, `동네 어머님'은 두 여자의 부축을 받으며 목욕탕을 나갔다. 어머님을 배웅하고 들어온 주인 여자가 쑥스러운 듯 활짝 웃으며 말한다. 치매 걸리면 OO 목욕탕에 보내 달라고 하라고.

나와 딸아이는 말없이 아주 천천히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고 머리를 말렸다. 잠시 후 주인 여자는 사우나실에 넣어놓았더니 아주 잘 익었다며 구운 달걀을 가지고 나와, 탈의실에 있는 여러 사람에게 하나씩 먹어보라고 했다. 나는 황송하고 어색하여 괜히 내 할 일만 계속하고 있는데, 평소 수더분하지 않은 딸아이가 여러 사람 속에 다가가서 달걀 하나를 깐다. 그리고 소금을 찍어서 내 입에 먼저 넣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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