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새가 된 아버지
노새가 된 아버지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9.04.1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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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강대헌 에세이스트
강대헌 에세이스트

 

다 저녁 때 배고파서/고개 숙이고 오니까,/들판으로 나가던 언니가 보고/“얘, 너 선생님께/걱정 들었구나.”//다 저녁 때 배고파서/고개 숙이고 오니까./동네 샘 앞에서 누나가 보고/“얘, 너 동무하고/쌈했구나.”//다 저녁 때 배고파서/고개 숙이고 오니까,/삽작문 밖에서 아버지가 보고/“얘, 너 어디가/아픈가 보구나.”//다 저녁 때 배고파서/고개 숙이고 오니까,/ 뷬에서 밥짓던 어머니가 보고/“얘, 너 몹시도/시장한가 보구나.”
`감자꽃'으로 널리 알려진 권태응이 지은 `고개 숙이고 오니까'라는 시를 70년이 지나고서 대하는 마음이 간단치만은 않습니다. 요즘 버전으로 옮겨 보라고 한다면, 다 저녁 때 배고파서 고개 숙이고 오더라도 따뜻하게 말 걸어줄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싶으니까요. (시의 주인공이 아무래도 초등학교 남자나 여자 아이로 보이니까, 대상에서 벗어나는 분들은 굳이 감정이입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저녁 때 배고파서 고개 숙이고 올 때 만나기 힘든 첫 순위는 누가 될까요?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영화 `라스트 미션(The Mule, 2018)'을 참고로 한다면, 어렵사리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평생 백합을 가꾸고 백합 관련 모임만 따라다니느라고 가족에게 소홀했던 얼 스톤(클린트 이스트우드 분)이 파산을 하고는 90세가 다 된 노인의 몸으로 노새(mule, 마약 운반책)가 되어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였습니다.
스파게티 웨스턴의 대명사처럼 볼 수도 있는 `황야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 1964)'에서 전설적인 캐릭터로서 위풍당당했던 30대 중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어깨가 굽어진 노인의 모습으로 목숨의 위협까지 받는 심부름꾼 노새가 되었더군요.
집 밖으로만 나돌던 얼 스톤이 다 저녁때 배고파서 고개 숙이고 오는 딸 아이리스(알리슨 이스트우드 분)를 대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얘, 너 어디가 아픈가 보구나”라고 물어봤을 리가 없겠지요.
얼 스톤이 어디 자식에게만 무심했겠습니까. 아내는 그런 얼 스톤을 남편과 아버지의 자리에서 내쫓고 말았습니다.
아들 크리스토퍼(제이든 스미스 분)를 희생적으로 돌보았던 아버지 크리스 가드너(윌 스미스 분)의 이야기를 담았던 영화 `행복을 찾아서(The Pursuit of Happiness ,?2006)'와는 상반되는 내용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만 저로서는 얼토당토않은 노새가 된 얼 스톤을 아버지의 자리에서 추방하고 싶진 않습니다.
대단한 끈기를 가진 덕분에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 말 대신에 탔다고 전해지기도 하는 노새는 수나귀와 암말의 잡종으로서 생식 능력이 없기도 해 “과거도 미래도 없는 슬픈 동물”로 여겨지기도 하더군요.
얼 스톤의 마지막 선택은 다른 사람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도 만드는 불법이긴 했지만, 노새처럼 슬픈 존재였던 그가 그나마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은 결국 아버지의 자리였다고 보고 싶습니다.
얼 스톤이 교도소 담장 안에서 가족처럼 키우던 백합의 또 다른 이름은 아마도 `후회'였을 겁니다.
공동체적 차원에서의 사람살이의 마지막 보루는 남녀관계가 아니라 가족이란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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