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움 타령
부러움 타령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19.04.10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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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지난주에 띄운 `내가 진정 부러운 건'이라는 고백편지에 짧은 답장을 주신 분이 적잖이 있었습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분도 있었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부러움도 약이 된다는 분도 있었어요.

그래요. 부러움의 대상이 경쟁자이고 경쟁자의 장점이라면 질 터이고, 그 부러움에 집착하지 않고 우직하게 자신의 강점을 키우면 약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라지만 닮고 싶은 것, 그렇게 되고 싶은 바람까지 이기고 지는 것으로 재단하는 세태가 조금은 씁쓸했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부러운 타령을 합니다. 부러움의 사전적 의미는 부러워하는 일이나 마음입니다. 부러움은 사람만이 갖는 심리적 현상이자 제어할 수 없는 천부인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러워할 자유도 있고 부러움을 누리고 싶은 욕망도 있습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고 좋은 점이 있으면 싫은 점도 있기 마련이라 남의 장점과 좋은 점은 절로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아무튼, 많은 분이 건강을 부러워했습니다. 생로병사의 길을 걷는 인간에겐 건강이 가장 원초적인 부러움이자 가장 절실한 부러움일 테니까요. 아픈 사람은 물론 신체 곳곳이 부실해지고 심약해지는 노년들에겐 더할 나위 없지요.

저도 협심증과 허리협착증을 앓은 지 오래되어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터라 무탈하게 생활하는 건강한 선배들을 보면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교차됩니다. 선배는 고령임에도 저렇게 푸르게 사는 데 나는 이 나이에 이 지경이 되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여 장타를 날리는 골프 잘 치는 젊은 사람보다 기량은 떨어져 가도 씩씩하게 즐골하는 노익장들이 더 부럽습니다. 아니 존경스럽습니다.

건강을 잃으면 돈이 산더미처럼 많아도, 지체가 아무리 높고 박학다식해도 남는 건 후회와 허망뿐입니다. 산해진미도, 여행도, 사랑도, 영화도 모두 물거품이 됩니다. 병석에 누워 꼼짝달싹 못하는 모 재벌 회장처럼.

민망스럽게도 목요편지를 연재하는 필자가 부럽다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못 하나 제대로 박지 못하는 기계치이자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그래서 이것저것 잘 만들고 잘 고치는 손재주 좋은 사람이 몹시 부러운 얼간이인데 말입니다. 하긴 글 쓰는 재주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제 알량한 글재주가 부러울 수도 있을 겁니다. 부러움은 상대성이니까요.

노래 못하는 사람이 노래 잘하는 사람을, 운동 못하는 사람이 운동 잘하는 사람을, 키 작은 사람은 키 큰 사람을, 장애인은 비장애인을, 가난한 사람이 돈 많은 사람을, 하급자가 상급자를 부러워하는 것처럼.

이렇듯 부러움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유한 매력과 장기가 있음에도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남의 장점과 장기를 보고 부러워합니다. 요즘 제가 부러워하는 건 황혼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노여움과 노파심과 노욕에 물들지 않은 사람, 매사에 자족하고 자애하는 사람, 주위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사람들. 머리는 희끗해도 선한 눈망울로 세상을 바라보고 천진난만한 웃음 지으며 유유자적하게 사는 이른바 곱게 익어가는 사람이 바로 황혼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아무튼,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부러움의 하수인이 되는 들러리 인생과 부러움을 반면교사로 삼아 끝내 부러움의 주인공이 되는 인생이 바로 그것입니다. 누구를 무엇을 부러워한다는 건 그리되고픈, 그리 살고픈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좋은 것, 옳은 것 마음껏 부러워하세요. 그리하여 끝내 그보다 나은 위인으로 우뚝 서기를.

/시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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