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의 꿈, 디지로그 수암골
도시재생의 꿈, 디지로그 수암골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4.0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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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벽화마을 청주 수암골은 석양이 차암 좋다.

단언컨대 우리나라의 도시 가운데 도시 한복판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볼 수 있는 곳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저녁 무렵 무심천 건너 멀리 부모산과 그보다 더 먼 서쪽의 산등성이 너머에서 붉은 노을이 도시를 비추는 장관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하루의 고단함을 싹 씻어주는 듯 감동이 피어오른다.

수암골은 아침 풍경도 참 아름답다. 우암산을 넘은 햇살이 산그늘을 지우며 서쪽으로부터 도시를 빛나게 하는 찬란함을 수암골 전망대에서 느리게 바라볼 수 있다.

그런 수암골이 요즘 수상하다.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주민들이 모여 밤 깊은 줄 모르고 수군거린다. 8주 동안의 도시재생대학에 참가하고 있는 주민들은 20여명. 이들은 수암골 카페 주인이 제공한 장소에서 도시재생을 통한 마을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뜨겁게 토론한다.

수암골의 처음은 낡고 처량하며 가난함이었다. 그 남루하고 지루하며 지친 모습으로 고여 있던 수암골이 새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은 몇몇 작가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벽화 그리기였다. 진통이 없지는 않았다. 벽화를 보러 오는 관광객들로 인해 사생활이 침해받고, 주민들도 졸지에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큰 불만이었다. 그러나 낡은 것은 향수가 되고, 흔치않은 모습으로 주목을 받으며 드라마와 영화 촬영이 이어졌다. 그 여파로 관광객들은 더 많이 몰려 연간 70만명이나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으며, 주민들도 이를 마을 발전의 기회로 삼아 다른 도시의 벽화마을과는 달리 수암골의 벽화는 여전히 싱싱하다.

문제는 고령자가 대부분인 원주민들과 마을 한 켠에 집중적으로 들어선 카페촌 상인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를 해결하는 선행조건으로 원주민과 상인의 상생공동체를 제안했고,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원주민과 상인들이 함께 만드는 동네 축제를 성황리에 치르기도 했다.

매주 수요일 저녁 열리는 수암골 도시재생대학의 모니터링을 위해 나도 꼬박 참석을 한다. 70대를 훌쩍 넘긴 고령의 원주민들과 젊은 상인들이 함께 모여 밤늦도록 마을 공동체를 위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일은 그 열기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이다.

이 자리에서 나는 몇 가지 조언을 했다. 우선 수암골의 현실을 장점으로 삼자는 것이다. 수암골에는 낡고 초라한, 그러나 구불구불 작은 골목이 아름다운 옛것으로 아직 잘 남아 있다. 그리고 저마다 각기 다른 맵시를 뽐내는 현대식 상가가 나란히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과거와 미래의 모습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동네가 흔하지 않다는 것은 커다란 장점이다. 이를 토대로 나는 이곳의 별칭을「디지로그 수암골」로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옛것과 새로움이 공존하는 수암골의 모습을 그려보자는 것이다.

주민들은 수암골이라는 동네 이름은 사실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수동이라는 과거 행정동의 이름과 우암산 기슭에 위치한 장소성에서 한 글자씩 따와 수암골로 부르게 된 것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된 것이다.

이를 토대로 옛것(아날로그)과 새것(디지털)의 경계를 중심으로 남성성의 `숫길'과 여성성의 `암길'로 구분한 뒤 그 중간쯤의 주차공간을 「사랑의 디지로그」 광장으로 이름 지어 각종 이벤트와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삼는 것도 충분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난개발로 표현되는 부정적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제각각 다른 모습의 수암골 카페 건물들을 포함한 동네를 다양성의 표상이라는 긍정적 요소로 만들 필요도 있다. 수암골에는 20개가 넘는 카페 중심의 신축 건물이 최근 10년 사이에 들어섰다. 이를 토지 자본이 장악하는 원도심의 잠식이라는 우려도 있으나, 한 동네에 이처럼 다양한 개성으로 저마다의 맵시를 뽐내고 있는 곳이 드물다는 점을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건물주의 상상과 건축가들의 예술혼, 그리고 다양한 건축 기법 등의 자료를 모아 그 의미를 기리는 것도 충분한 볼거리가 될 것이다.

수암골은 석양도, 아침 햇살도 참 아름답다. 거기 밤늦도록 모여 도시재생을 꿈꾸는 마을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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