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봄의 소리를 들어보자
사월, 봄의 소리를 들어보자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19.04.0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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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나는 유년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 시골의 봄은 모름지기 꽃보다 나물이었다. 겨우내 얼어 있던 땅속의 기운이 녹아내리면 할머니와 엄마를 따라 들로 나가 쑥이며 냉이, 달래를 캤고 졸졸 흐르는 개울물 틈에서 돌미나리를 뜯었다. 할머니는 달래를 깨끗한 물에 여러 번 씻어 흙을 말끔히 없앤 다음 도마에 놓고 다져 뚝딱 만능 초간장을 만드셨다. 사방이 봄볕으로 가득한 마루에 앉아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엄마가 향긋한 미나리전을 부쳐내고 방금 전 탄생한 초간장을 살포시 놓으면 그야말로 환상의 궁합이었다. 어느새 식구들은 엄마 앞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어 봄을 먹었다.

사월이 오면 집집마다 한 두 그루씩은 있는 과실수가 꽃을 피웠다. 옆집에는 살구나무가 한 그루 번듯하게 서서 우리 집을 향해 가지를 뻗었는데 덕분에 우리 집까지 꽃그늘이 져 봄철 내내 마당이 화사했다. 바람을 타고 꽃잎이 흩날리면 나도 덩달아 천방지축 함께 뛰어다녔고 비라도 내려 꽃잎이 떨어지는 날에는 우산을 쓰고 나무 밑에 주저앉아 왠지 모를 처연함에 울기도 했다. 철마다 열두 폭 화첩을 펼쳐놓은 듯 그림 같던 나의 옛집. 햇살이 깊은 날이면 엄마는 늘 마당을 가로질러 빨래를 널었고 나는 그 그늘 밑에서 책을 읽었다.

이래저래 부모님 곁을 떠나 산지 어느새 삼십 여년 가까이 되었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에 매달려 하루하루 숨 가쁘게 살았다. 열심히 살아 낸 덕에 물질적 풍요로움은 이뤄냈지만 채운 만큼 잃어가는 것도 있었다. 자연에서 얻어낸 쑥으로 절편을 만들어 주시던 할머니는 오래전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셨고 사월이면 어김없이 장을 담그고 장독대를 건사하던 어머니마저 이제 그 기운이 많이 쇠하셔서 걷기조차 어려워졌다. 봄철 농사일에 매달려 평생 분주하던 아버지 역시 집 안에서 대부분 시간을 소일한다. 삼대가 모여 함께 나물을 뜯던 들녘에는 몇 해 전 둘레길이 생겼다.

찰나 같은 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뒤를 돌아보게 한다.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내 삶의 풍요로운 시간이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고 글쟁이로 살다 보니 이 모든 추억은 오늘날 나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사방에서는 봄이 무르익고 있다. 어디에 그리도 많이 숨어 있었던지 이곳저곳에서 꽃들이 제 존재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향기를 뽐내고 있다. 거친 가지 끝마다 노란 빛깔 작은 잎들의 산수유는 봄의 전령사가 분명하다. 언 땅을 헤집고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내미는 민들레는 지난밤 하늘에서 내려와 밤새 놀다 미처 오르지 못한 싸라기별 같고 벽돌담 너머 이웃집 하얀 목련은 가족을 위해 안주인이 켜 놓은 외등을 닮았다. 겨우내 찬바람을 막아내며 고군분투하던 나무들도 초록의 향연을 펼친다.

잠시 일상을 멈추고 사월의 봄 속에 앉아 보자. 따뜻한 볕과 바람, 형형색색의 꽃, 열심히 고개를 내민 초록의 잔디, 봄이 사방에서 아우성이다. 삶은 목걸이를 하나 만들어 놓고 여기에 진주를 하나씩 꿰는 과정이라고 했다. 삶의 속도를 한 뼘쯤 늦추고 익어가는 봄의 소리를 들어보자. 한 알의 귀한 진주가 잉태될지도 모른다. 인디언들의 달력에도 사월은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 큰 잎사귀가 인사하는 달, 만물이 생명을 얻는 달,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이라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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