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벽돌 집
빨간 벽돌 집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19.04.09 20: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이쯤이었을까. 철망이 쳐진 빨간 벽돌담에 기대고 섰다. 얼굴에 와 닿는 햇볕이 따뜻하다. 아직 잔디는 누런 낯빛으로 죽은 듯 잠을 자고 있다.

지금은 사월 초, 그가 생을 마감한 그때는 3월 말을 조금 남긴 날이었다. 그날도 햇볕은 따뜻했을까. 이곳은 중국 다롄 시내에서 45km 떨어진 뤼순이다.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고, 순국을 한 장소이다. 뤼순 감옥은 안중근 의사 말고도, 신채호 선생과 이회영 선생, 그리고 수많은 독립투사가 이곳에서 갇히거나 생을 마감한 곳이다.

주말이라 그런지 다른 중국인들이 많이 보였다. 안중근 의사는 중국에서도 교과서에 실릴 만큼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 영향인지 몰라도 우리 팀의 가이드는 뤼순감옥에 대해 설명할 때 안중근 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세심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조선족인 가이드는 이곳에 있던 다른 독립투사에 대한 정보는 없는지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그곳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보고서야 신채호 선생과 이회영 선생이 그곳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미리 알아보고 가지 못한 내 잘못이기도 하다.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많은 중국인과 관람을 하다 보니 그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참담하고 우울한 마음을 억누르고 이곳저곳을 살피다가도 울컥하는 마음에 눈이 아프기도 한 우리와 그들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그냥 좋은 구경을 나온 사람마냥 웃는 사람들이 많았다.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도 그랬을까. 다른 나라의 아픈 역사를 볼 때 어떤 모습으로 관람했는지 생각을 하게 만든 순간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최고 수장 이토 히로부미 총감을 죽인 인물이었다. 때문에 뤼순감옥에서 특별 감시 대상이었다. 다른 죄수들과 달리 안중근 의사는 따로 떨어져 있던 독방에서 생활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막으려는 조치였을 것으로 본다. 그곳에서 안중근 의사는 `동양 평화론'과 많은 작품을 집필하기도 했다. `동양 평화론'은 갑자기 사형을 집행하는 바람에 미완으로 남은 작품이기도 하다.

안중근 의사가 갇혀 있던 독방 앞에는 많은 사람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독방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보기에는 무리인지라 차례를 기다려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찍으려고 하는 순간 그 안에 내가 들어가 있지 않은가.

우울하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의연했을 안중근 의사의 방에 이게 웬 말인가. 아무리 각도를 달리해도 초라한 모습으로 들어가 있는 나는 그곳에서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방안에서 서성이다 사람들의 어깨에 떠밀려 나올 수 있었다. 독방에서 외로웠을 안중근 의사의 뜻이었을까. 나 말고도 그곳을 들여다보는 모든 사람은 유리창을 통해 그곳에 갇혔다 풀려나곤 했다.

아기 돼지 삼 형제 중 셋째는 늑대를 막기 위해 튼튼한 벽돌로 집을 지었다. 그런데 일본은 누구를 위해 이리도 튼튼한 빨간 벽돌집을 지어 놓은 것일까. 백 년이 지난 지금도 끄떡없는 이 집을 보고 그들은 자랑스러워할까? 아니면 부끄러워할까. 적어도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 자신들이 쌓아 놓은 죄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마땅하다.

빨간 벽돌집을 둘러싼 빨간 벽돌 담 밑에 작은 민들레꽃이 노랗게 피었다. 살며시 다가가 옆에 앉아 보았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이 길에서 배웅을 했을 노란 민들레 후손의 옆에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