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통
환상통
  •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9.04.04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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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누군가 영혼을 보여 달라고 했던가?/ 보아라, 네 자신의 모양과 생김새를…”이라고 읊었던 미국의 시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은 마음이 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에도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때, 그는 동생을 찾아 전쟁터에 갔다가 생각지도 않게 부상당한 군인들의 치료를 도와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군인들을 치료하면서 그가 발견한 놀라운 현상은, 잘려나가 있지도 않은 팔과 다리의 아픔을 환자들이 호소한다는 사실이었다. 잘려나간 자리가 아프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잘려나간 자리가 아니라 이미 잘려나가서 존재하지도 않는 팔과 다리가 아프다는 것이다. 팔이 잘려나가고 없는 데 없는 팔의 손가락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것이다. 이것을 의학에서는 환상통(幻想痛)이라고 부른다.

손을 다쳤다고 할 때, 아픈 것은 손일 테지만 그 아픔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뇌다. `아픈 것은 손인데, 왜 뇌가 아픔을 느낄까?' 참 이상하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아픔을 느끼는 것은 뇐 데 왜 손이 아플까?',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아픔을 느끼는 뇌는 아프지 않고 왜 느끼지도 못하는 손이 아플까?'라는 것이다. 환상통이란 아픔의 주체가 다친 신체가 아니라 사람의 뇌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이런 환상통을 내 신체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집에 대해서도 체험한 바 있다. 방이 4개인 아파트에 살다가 방이 3개인 아파트로 이사했다. 옛날 집에는 서재에 책상과 책꽂이가 있었고, 작은 방에도 책꽂이가 있었다. 서재에는 주로 과학에 관한 책들, 작은 방에는 주로 인문학이나 문학에 관한 책들이 있었다.

이사를 오면서 두 방에 있던 책 중에 앞으로 보지 않을 책들을 다 버리고, 새 아파트 서재 책꽂이에 모든 책을 다 꽂았다. 그런데 이사 한 후에 내가 인문학이나 문학에 관한 책을 찾으려 할 때 나는 없는 작은 방을 생각하게 된다. 그 방 책꽂이 몇 번째 칸에 있을 그 책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래서 책을 찾을 때마다 그 방으로 가려고 하는 충동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방과 그 방의 책꽂이, 거기에 꽂혀 있는 책의 느낌은 이사가고 몇 달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고 생생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없어도 그 팔다리의 느낌은 뇌에 존재하듯이 이사가서 이제는 내 집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내가 들어갈 수도 없는, 그래서 전혀 내 것이 아닌 그 옛 아파트의 작은 방은 아직도 나의 뇌 속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기억은 존재하고 있던 것들로부터 만들어지지만, 만들어지고 난 후에는 그 소유권이 그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뇌 속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모든 고통은 환상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순간 가시에 찔린 손의 통증도 사실은 나의 뇌가 느끼는 느낌일 뿐이지 손의 아픔은 아니다. 뇌의 환상통일뿐이다. 잃어버린 자식이나 헤어진 애인에 대한 아픔도 환상통이다. 가버린 애인이나 잃어버린 자식이 아픈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애인이나 자식을 생각하는 내가 아픈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아픔이 자기의 아픔이 아니라 애인이나 자식의 아픔으로 느끼게 된다. 없어진 내 팔다리가 아프듯이 잃어버린 내 자식이 아픈 것이다. 환상통이다.

모든 고통이 환상통이기에 역설적이게도 고통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고통이 사물 자체에 있다면 그 사물을 제거해버리면 고통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인간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고통의 원인인 사물을 제거한다고 해도 고통은 없어지지 않는다.

마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없앨 수도 없다. 모든 고통은 환상통이고, 환상통은 마음의 병이기에 없애기가 어렵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하지만 마음먹는 일이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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