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년의 역설
풍년의 역설
  • 반영호 시인
  • 승인 2019.04.04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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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반영호 시인
반영호 시인

 

어느새 여든이신 큰형은 `이제 힘이 부처 농사일을 접겠다'며 내게 밭 천여 평을 내주셨다. 이 밭에다 무얼 심을까 고심하다가 농사를 짓는 선배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선배는 “그래? 나도…….”하고 말문을 열다가 멈추는 것이었다. 나는 당연히 `나도 그런 형이 있었으면'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선배는 뜻밖에도 “그래. 나도 자네 형처럼 그런 형이었음 좋겠네.” 사실 그 선배의 동생은 일찍이 소아마비 장애를 앓는 동생이었다. 내내 가슴이 짠했다.

삼월 말이다. 삼월 말에서 사월 초순이 감자 심는 시기다. 베란다에 보관해 두었던 씨감자 주머니를 풀었다. 벌써 눈언저리가 푸르스름하게 녹색을 띠고 있고 더러는 노랗게 싹이 올라와 있다. 씨눈에서 싹이 튼 것이나 녹색을 띤 것은 몸에 해가 되는 독소 성분 `솔라닌solanine'이 생긴 것이다.

솔라닌 중독의 위험부위는 저장 중에 생기는 흔히 볼 수 있는 녹색부위와 발아한 새로운 싹이다. 이곳에는 0.1% 이상의 솔라닌을 함유하고 있다. 사람에게서 식후 5~6시간 이내에 발병하는데 복통, 언어장애, 의식 장애 등을 일으킨다. 그래서 감자 싹은 반드시 잘라내고 먹어야 한다.

독이 있는 녹색을 띤 눈언저리는 얼마나 단단한지 칼로 도려내려 하면 칼도 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대개 감자를 심기 위해 눈을 떼 내려면 보통 2~3조각을 낸다. 눈 부위 말고 다른 곳은 도려내는데 별문제가 없지만, 싹을 틔울 눈만은 용납하지 않는데, 이는 후세를 위한 최후의 방어 수단이 아닌가 싶다. 대단한 모성이다.

선배가 가르쳐준 대로 로터리를 치고 골을 만들고 비닐 씌우기를 했다. 그런데 농사일이란 게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짓는 게 아니다. 그야말로 과학 영농시대다. 그런데 농사를 잘 지어도 걱정이란다.

“저 아까운 채소를 그대로 버리다니! 저 채소 나한테 주지!” 배추, 무, 양파 등등 채소들이 산지에서 그대로 버려진다는 소식을 접하면 흔히들 나오는 소비자들의 탄식이다. 그렇다. 농사가 아주 잘 돼도 문제다.

채소가 남는다고 해서 그 작물들을 소비자에게 싸게 혹은 공짜로 줄 수는 없다. 풍년이라 채소가 많아졌다고 해서, 그 물량이 그대로 시장에 풀리면 가격이 더 떨어진다. 채소 가격이 떨어진 상태에서는 산지에서 수확하고 판매지로 이동시키고 포장하는 비용까지 들면 더더욱 남는 게 없어진다. 이 때문에 생산자들은 채소 가격이 떨어지면 그대로 현지에서 갈아엎는 산지폐기를 택하게 된다. 밭에서 애써 키운 작물을 갈아엎는 농민들의 상심이 느껴진다.

지난해 유난히 포근한 겨울이 지속하면서 올봄에 채소 풍년이 들었다. 채솟값이 폭락하자 어김없이 전국에서 산지폐기가 이뤄지고 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폐기 규모가 더 커질 것으로 예상한다. 지난 5년 동안 산지폐기 비용에만 500억 원이 쓰였다. 애써 키운 작물들을 버리는 농민도 농민이지만, 버리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또 들여야 하는 정부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감자농사를 준비하며 시작부터 걱정이다. 물론 대규모 농사는 아니지만 당장 올가을엔 자두나무 300여 주를 심어야 하는 나로서는 그냥 흘려들을 얘기가 아니다 보니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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