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 대지의 기억
일상생활 - 대지의 기억
  • 안승현 청주한국공예관 학예실장
  • 승인 2019.04.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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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안승현 청주한국공예관 학예실장
안승현 청주한국공예관 학예실장

 

휴일시간은 평소보다 길다. 새벽녘 푸름의 기운만 느껴진다 싶으면 눈꺼풀이 자동으로 열리며 하루의 서막을 알린다. 몸은 스프링처럼 뜰로 향한다. 그간 구상했던 바를 실행에 옮기느라 그 어느 날보다 서둘러 몸을 재촉한다. 오늘은 특별히 목공도구와 나무를 챙기는 일로 분주하게 움직이니 새벽에 찾아든 새들과 함께 한다.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던 기이하게 생긴 돌을 세울만한 나무를 골랐다. 수석받침대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 장식적인 것이 아니고 돌을 세울만한 보조받침대 정도의 형태다. 나무는 각재를 중심으로 톱질하고 조각도로 홈을 파고 세우기를 반복한다. 곧추세워졌다 싶으면 오일을 바르거나 불로 지지고 골파기를 하여 시간의 흔적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다. 나무를 만진 시간이 많아 나무의 형태만 봐도 대충 어떤 형태가 될지 감이 온다.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재미가 있다. 바닥에 나뒹굴던 돌들이 각자 개별적으로 위치를 점한다.

그간 모아두었던 헌 도마를 준비한다. 길을 가다 버려진 도마나 나무판재를 모아놓은 것이 꽤 된다. 사각형이고 칼질로 난도질당한 터라 참으로 볼품없는 나무판재이지만 그 위에 다른 형태의 모양을 그린다. 직소로 연필선을 따라 오려내고 샌딩을 한다. 손잡이 부분은 끌로 좀 더 다듬으니 전혀 다른 형태의 도마가 만들어졌다. 빵도마나 치즈, 스테이크 도마로 사용해도 좋을 듯하다. 사각형의 획일화된 칼도마가 전혀 다른 도마가 된다. 만들면서 벌써 누구에게 줄까 고민을 하게 된다. 오일을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려 펼쳐놓으니 각기 다른 색과 목리를 뽐내고 있다. 어떤 것은 옹이가 있고 어떤 것은 촘촘하고 어떤 것은 나이테가 보이지 않는다. 없지는 않겠지만 너무 희미하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선에서 간격의 차이를 보이고 부러진 부분이나 삭정이가 잘려나간 부위를 에워싼 흔적의 목리까지 다양해도 이리 다양할 수가 없다. 같은 나무이건만 서로 다른 환경의 조건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한동안 넋 놓고 보았다. 매번 보는 목리인 데 볼 때마다 시간을 정지시킨다. 그 수많은 나무의 단편이 서로 다름을 매번 새로이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나무를 대할 때마다 나이테를 읽는다. 어느 시점에서 날이 무척이나 추워 움츠릴 수밖에 없던 시간을 간직하고, 어느 순간 가진 커다란 상처를 감싸느라 오랜 세월 무던히 참았던 시간을 함께 느낀다. 많이 자라지는 못했지만 촘촘한 나이테가 대견스럽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스스로 치유하고 산 시간을 품었다. 그러면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내심 그렇게 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무를 켜지 않는 순간 그 어떤 사람도 속을 알 수 없다. 귀를 기울이고 들어본다 한들 귀는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데 어찌 듣겠는가? 나만 아니면 다른 사람이야 어떻든 다른 사람이 느끼는 아픔. 뭐가 그리 대수인지 이해할 수 없단 생각으로 무장된 사람들의 집단에서는 더더욱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건만 결국은 마무리 못하고 하루가 저문다. 생각이 많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나무를 만지는 날이면 많은 것이 나를 채우고 시간을 멈추게 한다. 대지에 씨 하나를 떨궈 뿌리를 내리고 가느다란 줄기는 몸집을 키우며 많은 것을 담고 자리를 지킨다. 한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그간의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잠시 찾아든 한 마리 새가 어찌 그 기억을 함께 공감할 수 있을까. 대지가 품고 대지와 시간을 함께한 나무의 연륜은 곱지도 않은, 괴상하리만큼 굴곡진 나이테를 가지고 있지만, 연륜은 대지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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