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봄과 세한도, 그리고 시인 신동엽
제주의 봄과 세한도, 그리고 시인 신동엽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4.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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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제주의 봄은 오랫동안 침잠(沈潛)이었다.

육지보다 이른 봄은 이맘때 쯤 노오란 유채꽃이 하마 지천이고, 제주가 원산지인 왕벚꽃은 어쩌면 서럽게 함박눈 닮은 꽃잎을 떨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상의 모든 생물이 눈을 뜨고, 겨우내 차갑고 두터웠던 흙을 뚫고 새싹이 세상을 흔드는 봄. 그러나 4월 3일에 이르면 제주의 봄은 차마 봄이 아니었다.

“날이 차가워져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바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완당(추사)은 유배지 제주를 찾아온 제자 이상적에게 잣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집 한 채가 그려진 <세한도(歲寒圖)>를 선물하며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그리고,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前)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後)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라고 끝내 탄식한다.

「뼈가 시리다/ 넋도 벗어나지 못하는/ 고도의 위리안치 찾는 사람 없으니// 고여 있고 흐르지 않는 절대 고독의 시간/ 원수같은 사람이 그립다 누굴 미워라도 해야 살겠다 (후략)」<유자효 시. 세한도. 부분> 그날 이후 제주의 봄은 늘 사무쳐,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뼈와 살을 에는 듯한 <세한도>의 시퍼런 서슬과 다를 수 없다.

누굴 미워할 수도, 원망할 수조차 없이 강요된 침묵과 고립 속에서 불을 켜지 못하고 제사를 지내야 했던 수많은 주검과 그들의 식솔들.

거짓말 같은 일은 실제로 벌어졌던 비극의 역사이고, 죽음은 해방공간 제주에서 도민 1/10에 달할 만큼 참혹했다. 이념을 빌미로 자행된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1948년 4월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무려 6년이 넘는 기간 동안 멈추지 않았다.

차라리 서러워할 하늘이라도 있었던 여느 죽음과는 달리 표현할 수도, 마음껏 슬퍼하거나 비통해할 수도 없었던 제주의 봄.

사람들은 결코 그날을 잊지 않았고, 작가 현기영은 <순이삼촌>을 통해 국가 권력에 의해 자행된 무고한 양민에 대한 학살을 고발하면서 숨기려 들었던 참혹한 역사를 들춰낸다. 소설에서 `순이삼촌'인 그녀(제주에서는 “촌수를 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 어른을 남녀 구별 없이 흔히 삼촌이라 불러 가까이 지내는 풍습이 있다”고 작가는 설명한다)는 비극적 4.3사건의 한 가운데서 두 자식을 잃었으나, 살아남은 `순이삼촌'은 심각한 정신적 외상으로 평생을 신경쇠약과 환청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반성과 단죄, 화해와 용서가 없는 역사와 인간에 대한 연좌를 경고한다.

제주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이 되었다. 다행스럽게 양민 학살이 멈춘 이후 46년 만인 2000년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고,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의 진상조사와 정부 차원의 보고서 채택, 고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으로 역사는 간신히 불을 밝혔다.

그러나 <평화의 섬>이 영문도 모르는 이념에 희생된 양민의 넋을 위로하고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통해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는 평화를 말하는 것인지, 오로지 먹고 놀기 좋은 관광낙원을 표방하는 것인지 여전히 알 수가 없다.

오는 4월 7일은 신동엽 시인의 59주기. 제주사람들은 아직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후략)」(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부분) 며 아직 경계와 의심을 풀지 못하고 있다.

거기 제주에서 두만강 끝자락까지「(전략)꽃피는 반도는/ 남에서 북쪽 끝까지/ 완충지대./ 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이 씻겨가고/ 사랑뜨는 반도,/ 황금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 높이 높이 중립의 분수는/ 나부끼데//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자면서 허망하게 우스운 꿈만 꾸었지」(신동엽.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 밤은. 부분)처럼 4월은 가라앉지 말고 꿈처럼 되살아나는 계절. 육지에도 마침내 봄꽃이 피어나니, 그 찬란함으로 모진 가난을 달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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