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지게 사는 갑(甲)은 없나
값지게 사는 갑(甲)은 없나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9.04.02 1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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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김금란 부국장
김금란 부국장

 

갑(甲)이 판치는 세상이다.

배웠다고, 많다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거드름 피우는 이들로 서민의 삶은 더욱 팍팍하다.

배웠으면 나누지 못한 것을, 지위가 있으면 살피지 못한 것을, 많다면 베풀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함에도 세상은 왜 이들을 당당하게 만들었을까.

요즘 화제 인물은 `미쳤어 할아버지'다.

지병수 할아버지는 KBS TV 프로그램인 전국노래자랑 서울특별시 종로구 편에 출연해 댄스 가수인 손담비의`미쳤어'를 부르며 스타가 됐다. 지 할아버지의 나이는 77세. 원곡자 손담비의 춤과 노래를 그는 어설픈 율동과 느릿느릿한 가사를 선보였지만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젊은 네티즌들 역시 고령의 나이에도 손담비의 `미쳤어'를 따라 부른 지 할아버지를 응원했다. 지 할아버지의 SNS 영상은 게재 3일 만에 조회 수는 84만을 넘었고,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하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춤에 손담비는 답춤을 선사했다.

지 할아버지는 전 국민이 지켜보는 방송에서 기초 생활수급 대상자임을 공개했다. 그는 “아프지 않고 즐겁게 살다가 어느 순간에 가는 게 행복이라 생각한다”고 당당히 말했다. 지 할아버지는 가진 것이 없다. 누릴 권력도 없다. 하지만 남의 인생을 짓밟고 권력을 쫓고 돈의 노예가 된 갑들보다 값진 인생을 살고 있다.

부와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은 주주들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나는 첫 재벌총수가 됐다.

대한항공 장녀의 땅콩 회항 사건, 차녀의 직원을 향해 던진 물벼락 사건, 부인의 폭언·폭행에 이르기까지 사주 일가의 갑질 결과는 그들에게 부메랑이 됐다. 결국 대한항공 사주 가족은 비상은커녕 추락의 끝을 보여줬다.

학교 울타리 안에서도 사라져야 할 갑이 수두룩하다.

성균관대 약학과 A교수는 딸의 입시 논문에 제자인 대학원생들을 동원한 사실이 드러났다.

A교수는 딸의 연구과제 수행을 위해 제자인 연구실 대학원생들에게 동물실험을 지시한 것은 물론 논문 작성에도 제자들을 이용했다. A교수의 딸은 대학원생들이 작성한 연구과제 보고서, 포스터 등의 결과물로 각종 연구과제상 등을 수상했고, 단독저자로 SCI급 저널에 논문을 게재한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A교수의 딸은 유명 대학의 대학원에 합격했지만 대학원생들은 졸업논문의 키를 쥔 지도교수의 갑질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교육부는 A교수에 대해 중징계인 파면을 대학에 요구했다. 또한 비슷한 갑질이 있었다는 증언이 확보된 그의 아들에 대해서도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서강대에서는 로스쿨 교수가 강의 도중 강남 클럽 버닝썬 등과 관련한 부적절한 발언으로 학교 당국이 진상조사에 나섰다.

이후 이 대학에는`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학생 乙(을)'이 쓴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甲(갑) 교수님께 올리는 편지'라는 제목의 3장 짜리 대자보가 붙었다. 대자보 작성자는 “교수님의 조언과 농담이 정의, 평등, 인권을 말하는 교수님의 언사를 퇴색시키고 혐오와 차별의 탑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해 로스쿨에 대한 낭만도 부서져 버렸다”고 지적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발표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직장인의 88.1%는 자신을 을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값진 인생을 하찮게 여기는 갑들 탓에 가진 것 없어도 당당한 을들의 삶이 더욱 값지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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