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구름같이 여기기
뜬구름같이 여기기
  • 신금철 수필가
  • 승인 2019.03.28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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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금철 수필가
신금철 수필가

 

꼬박 하루가 걸렸다. 갑자기 추억의 앨범을 들추다 뱃머리에서 영화의 한 장면을 흉내 낸 사진에 눈길이 꽂혔다. 주인공 잭과 로즈처럼 남편과 팔을 포개어 양옆으로 벌리고 활짝 웃는 사진 속의 나는 행복해 보였다. 오래전에 본 영화지만 미국과 세계 시장에서 흥행신기록으로 아카데미상을 석권한 영화 속 사랑의 잔영이 짙게 남아 있다.

영화제목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었겠지만 내 기억의 방에서 그것을 꼭 꺼내겠다고 작심하고 `가나다라'를 시작으로 기억을 더듬어 드디어 생각해냈다. 어려운 퀴즈라도 맞춘 것처럼 기뻤다.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제목을 기억해내는 데 하루가 걸린 것이다. 나이를 계산하며 기억력의 저하를 실감했다.

“시간이 넘었는데 왜 아직 안 와요?”

전화를 받고서야 지인들과 모임이 있는 날이 생각났다. 모임을 잊었다는 말이 입속에서만 맴돌 뿐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오기傲氣를 부린다. 지금 출발해도 모임 장소까지 가려면 30분은 족히 기다려야겠다는 약삭빠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미안해요.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겼는데 미리 연락한다는 걸 깜박했네요. 다음번엔 꼭 나갈게요.”

능청스런 거짓말을 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점점 더해가는 기억의 단절로 미아처럼 느껴졌다.

“할머니, 내일이 무슨 날이 게요?”

기저귀 갈아주고 우유 먹이며 숨바꼭질하면서 애지중지 키운 손녀의 물음에 며칠 전만 해도 기억했던 손녀의 생일이라는 걸 알았다. 머리를 때리며 기억의 창고 문이 닫힐까 걱정스러웠다.

기억력의 감퇴는 `베타아밀로이드'라는 독성 물질이 쌓이면서 시작된다고 한다. 흡연이나 기름진 식습관 등으로 뇌혈관이 빨리 좁아지고, 노화과정에서 뇌의 기억을 담당하는 영역들이 퇴화하거나 각 영역을 연결하는 신경물질이 줄어드는 탓에 생기게 된다니 나이 탓이려니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 몸의 근육이 사용할수록 강해지듯이 뇌 역시 사용할수록 점점 좋아진다. 나이 들면 책을 읽을 때 눈으로만 보지 말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는 것도 기억의 좋은 방법이다. 또한 운동은 기억력 향상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손꼽힌다. 매일 30분 이상의 운동을 하면 뇌의 혈류순환을 촉진시켜 뇌세포가 활성화 되며 특히 중년에 접어든 이후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치매의 발병률이 많이 줄어든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언제까지 내 기억이 온전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게다. 기억력의 저하는 나이 들어 노화로 생기는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라 생각하고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

삶의 끝자락에선 영원할 줄 알았던 행복도, 죽을 만큼 아팠던 고통의 세월도 뜬구름일 게다. 재산도, 명예도, 기억도 뜬구름처럼 허무하게 사라진다. 잃어버린 기억들을 되찾으려 애면글면하지 말고, 남아있는 기억들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모처럼 미세먼지를 벗은 파란 하늘에 하얀 떼구름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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