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살아가기
`눈이 부시게' 살아가기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3.26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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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TV드라마가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루에도 수십 편의 드라마가 쏟아져 나오는 물량 공세로 기억회로가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기억하는 드라마 가운데 손꼽히는 것은 정규 편성으로 방영된 지 무려 47년이 지난 <여로>이다. 장애를 지닌 남편과 그에게 극도로 헌신적인 현모양처의 갈등과 위기의 극복, 가족 구성원의 재결합이라는 희망적 줄거리가 아직도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여로>를 기억하는 것은 그 줄거리보다도 신문물인 텔레비전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더 크게 작용됐을 것이다.

최근 종영된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아주 오래오래 기억 속에 간직하고 싶은 수작이다.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눈이 부시게>는 `기억'을 자극한다. 시간의 속도는 정상의 상태와 다르게 전개되고, 젊은 생각(기억)은 늙은 몸의 현실과 기묘하게 결합되는데, 전혀 환상적이지 않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런 이상함은 기억의 편린이 부서지는 알츠하이머 증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손톱을 깨물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던 혜자(김혜자 분)의 마지막 독백.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큼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거기 치열하고도 억울하기 그지없는 청춘은 시계를 빨리 돌려서라도 이 절망 같은 세상을 벗어나고 싶은 회한이 있다. 그리하여 이미 늙은 몸으로, 아직 현실의 세계에서 팔팔한 청춘으로 남아 있는 연인을 못 잊어 주변을 서성거리는 <혜자>는 우리 모두의 애틋함으로 `기억'된다.

평범한 우리 모두의 삶에서 <혜자>처럼 주어진 시간을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졸지에 70세 노인이 되어 버린 25살 여자의 처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젊음과 늙음, 그 서서히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에서, 역시 서서히 채워져야 할 기억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탈시간의 구조로 새삼 일깨워 준다. 거기에서 피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은 헬조선 청년세대의 서러움을 읽어낸다는 것은 지나친 비극이다.

“생명을 얻고 싶다면 먼저 그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첫 번째가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이 처음이 될 것이며, 마음이 온유한 자가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 사랑을 받으려면 우리가 먼저 사랑을 주어야 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신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지상의 이웃에게 정성을 쏟아야 한다. 철학에서도 역설을 옹호한다. 지혜는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위대함은 우리의 한계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 (윌리엄 새들러. 「서든 에이지, 마흔 이후의 30년」에서)

책을 읽다가 스스로에게 위안으로 삼을 수 있겠다 싶어서 형광펜으로 밑줄을 쫙 그어 두었던 문장은 <눈이 부시게> 찬란한 <혜자>의 평범한 삶에 비해 부끄럽다.

우리는 끝까지 청춘일 수 없듯이 처음부터 노인일 수도 없다.

그리고 <눈이 부시게> 찬란했던 저마다 인생의 순간들 또한 전혀 기억할 수 없거나 아주 일부분만 기억함으로써 개인적 쓸쓸함과, 늙은이와 치매 또는 알츠하이머로 함부로 격리되는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눈이 부시게>에서 가장 눈부신 것은 보통의 위태로운 노인들이 악의 무리를 물리치는 장면.

지금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이들은 어김없이 가진 자들. 평범한 순간순간이 눈부시게 세상을 살아가는 소중한 힘. 4월은 지금보다 더 찬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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