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단상
봄비 단상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19.03.25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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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꽃이 피고, 풀이 푸릇푸릇 돋아나고, 나무에는 연록의 어린잎이 피어난다. 바야흐로 봄의 향연이 시작된 것이다. 무대 위에 보이는 주인공들은 꽃과 풀, 잎이지만, 이들을 길러내는 조력자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따뜻한 봄바람과 대지를 촉촉이 적셔 주는 봄비가 이들을 길러 낸 숨은 조력자들이다. 간혹 봄바람은 꽃샘추위에 밀려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도도한 흐름이 바뀌지는 않는다.

봄비 또한 춘설(春雪)에 자리를 내주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극히 예외적일 뿐이다. 봄바람과 봄비를 견준다면, 사람들은 아무래도 봄비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더 드러내곤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봄바람보다는 봄비가 훨씬 감각적이기 때문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김구용(九容)은 이러한 봄비에 대한 감각을 섬세하게 잡아내고 있다.

춘일대우유감(春日對雨有感)

千花萬柳氣空濛(천화만류기공몽) 천만 꽃과 버들 속에 가랑비 자욱한데
城北城南綠映紅(성북성남록영홍) 성의 남북에서 녹색 풀이 붉은 꽃에 비치네
最好雨餘樓上見(최호우여누상견) 비 온 뒤 누대 위에서 바라봄이 가장 좋고
却愁明日有東風(각수명일유동풍) 도리어 내일 아침에 봄바람 일까 근심이네

봄꽃이란 봄꽃은 다 피었고 버드나무 가지란 가지에는 모두 연록의 빛이 스미었다. 이미 세월은 봄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봄의 성찬을 거의 다 차린 상태였다. 성대한 봄의 향연 더욱 분위기 있게 만들어 준 것은 마침 자욱하게 내려 준 가랑비였다.

활짝 핀 꽃들과 물오른 버들가지를 더욱 촉촉하고 생기 있게 만들어 주는 가랑비 또한 향연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향연이 있기까지 주인공들을 성장시킨 일들 공신이기 때문이다. 그 공신이 잔치에 직접 참여하여 잔치 분위기까지 살려 주니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봄의 향연에 취하여 이곳저곳을 쏘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녹색과 붉은색이 서로를 비추며 생의 절정을 만끽하는 모습들이다. 봄의 한복판이면 어딜 가나 절경이지만, 그 절경이 더욱 돋보이는 때와 장소가 있으니, 비 온 뒤 누대 위가 바로 그것이다. 시인은 마침 비 온 뒤 누대 위에서 봄의 향연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이보다 더한 호사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호사를 누리던 시인의 뇌리에 뜻하지 않은 걱정거리가 생겼다. 내일 아침 동풍이 불어 꽃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 것이다.

꽃과 풀과 잎은 봄의 주인공들이다. 이 주인공들을 길러 내고, 말끔하게 단장시키는 것은 봄비이다. 봄비 내리는 날 우산을 쓰고 들판에 나가 봄비의 정성스런 선물들을 듬뿍 받아 오는 것은 인생의 큰 낙이 아닐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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