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기
경운기
  • 박희남 수필가
  • 승인 2019.03.2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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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희남 수필가
박희남 수필가

 

우리 집에는 여러 가지 농기계가 있다. 트랙터, 콤바인, 이앙기, 관리기 등등. 모두가 필요하고 나름대로 쓰임새가 다양한 농기계들이다. 일손이 많이 부족한 게 농촌의 현실이다 보니 이런저런 농기계들로 기계화되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 많은 농기계 중에서도 유독 딸딸이 경운기에 애착이 간다.

다른 값비싼 농기계들이 보편화 된 지는 불과 몇 년 사이지만 경운기는 새마을사업이 시작되던 때부터 보급되기 시작해서 농산물 수입개방 때문에 농촌의 현실이 어두워진 지금까지 경운기는 농민과 더불어 희로애락을 함께 한 농기계라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경운기는 왠지 생각만 해도 기운이 솟는 것 같고 상쾌한 기분이 든다. 아마도 그 특유의 엔진 소리 때문인 듯하다. 트랙터나 콤바인, 이앙기 같은 농기계는 가격은 엄청나게 비싼데, 비싼 만큼 다양한 기능이 없다. 하지만 경운기는 가격도 비싸지 않고 고장도 거의 없으면서 재주 많은 사람처럼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경운기의 다양한 기능 때문에 좋아하기도 하지만, 내가 유독 경운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하루 일을 마친 어스름한 저녁,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맥이 빠져서 집으로 돌아올 때의 풍경 때문이다. 남편이 운전하는 경운기에 앉아 있으면 경운기는 나에게 위안을 주려는 듯, 노래를 불러주는 듯, 박자를 맞춰가며 경쾌한 소리를 낸다. 그럴 때면 길가에 들꽃들도 경운기 리듬에 맞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춘다. 붉은 노을과 계절을 따라 피고 지는 고운 빛깔의 들꽃들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피곤했던 몸이 가뿐해지고 털털거리는 경운기가 안락하게만 느껴진다.

나의 친정동네는 아주 산골마을이다. 면 소재지로 가는 길은 높은 고개를 넘어서 걸어다닐 수 밖에 없는 좁은 산길과 경운기는 다닐 수 있지만 돌고 돌아서 8㎣나 되는 작은 신작로가 고작이었다. 지금은 농촌에도 자동차가 있는 집이 많아서 경운기의 기능이 예전보다 줄었지만, 전에는 장날이면 여지없이 경운기는 가장 좋은 자가용이었고, 비료나 농자재를 실어 나르는 유일한 운반 수단이었다.

그때 우리 동네에는 두 대의 경운기가 있었고 장날이면 우리 엄마를 비롯한 아낙들은 올망졸망 장에 내다 팔 잡곡 보따리를 회실 마당으로 가지고 나와서 경운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어머니가 이웃집 총각의 경운기를 얻어 타고 장에 가신 날에는 어쩌면 빨간 운동화를 사 오실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동구 밖에 나가서 경운기 소리가 들리기만을 고대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요즘의 값비싼 승용차보다도 더 부러웠고 멋지게 보이던 경운기. 아직까지도 내겐 단지 농사일에만 쓰이는 단순한 농기계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아마도 어린 날의 그런 기억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경운기를 운전하는 이웃집 오빠가 존경스럽고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이제 내가 가끔 경운기를 운전해보면 `별게 아니었구나' 하며 속으로 웃는다.

우리 아이들은 차를 타는 것보다 경운기 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차는 거의 매일 타는 거니까 호기심도 재미도 없지만, 경운기는 가끔 타보는 것이어서인지 그저 재미있어한다. 농촌 환경의 변화 속에서 우리 아이들의 기억 속에 경운기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 내가 경운기를 보며 떠올리는 추억들을 그 애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자꾸만 빈집이 늘어나서 썰렁하기만 한 이 농촌의 새벽을 내일은 또 어느 집 경운기의 엔진 소리가 깨워놓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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