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이방인
이 시대의 이방인
  • 이영숙 시인
  • 승인 2019.03.2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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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가 왔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첫 문장이다. 책장에서 다시 이 책을 꺼내 든 것은 첫 교양 강의 주제로 `왜 독서 토론인가?'를 설정하고 하브루타 수업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이십 대를 목적 없이 표류하다 사업에 뛰어들어 절망의 세월을 보냈던 한 젊은 사업가는 “내가 진작 그때 뫼르소를 알았더라면 조금 덜 힘들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오래전 내가 기억하는 뫼르소는 이 현실에 맞지 않는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다. 죽음을 덤덤히 관망하고 순간순간을 제 감정대로 흐르는 신념 없는 반항아였다. 그런데 텍스트를 읽는 내내 그림이 그려지고 큰 틀이 보인다. 여고 시절에 읽을 때는 그 첫 문장에 심기가 불편하여 주마간산 격으로 슬슬 넘겨버린 문장들이다. 카뮈가 `이방인'이라고 설정한 표제는 실존 사상으로 해석할 부분이다. 통상적으로 보편에서 먼 삶은 이방인의 삶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자기 죽음 앞에서 철저하게 의연했던 주인공의 삶은 햇볕 날카롭게 내리쬐는 정오의 사상이 배경이다.

`양로원에 계신 어머니가 왜 느닷없이 연인을 만들고 지나온 삶을 다시 되새김하는 놀이에 빠졌는지 알 것 같다.'는 뫼르소의 회상 장면에 속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시시각각 직면하면 삶은 노예도덕에 갇힌다. 누구도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고 자유롭지 못하다. 그 삶에 어떤 희망을 심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양로원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그 나이에도 새로운 연인을 만나 밀회를 꿈꾸는 것이 아닌가.

주인공의 어머니도 죽음이라는 화두를 등지고 살았다. 그러므로 죽는 순간까지 연인과 희망적인 삶을 살았다. 죽음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모자를 보면서 카뮈가 『이방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려는 창작 의도를 유추한다. 죽음을 뒤로하고 매시간 자기 긍정하며 살라는 전언이다. 사실 나답게 살지 못하는 나들이 이 사회는 물론 자신을 절망 가운데 빠트리고 우울하게 만든다. 매 순간 다른 사람의 삶과 비교하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뫼르소는 섬뜩할 정도로 주체적이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다음 날 연인과 해변으로 놀러 가고 코미디 영화를 보고 정사를 나눈다. 그가 해변에서 아랍인을 만나 총을 겨눈 것은 살의를 품고 다가오는 상대방에게서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정당방위였다. 햇살이 칼끝에 반사돼 자신을 찔렀기 때문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 법정은 어머니의 장례식 때 보였던 전단계의 비도덕성까지 가산하여 사형을 선고한다. 그의 은유는 아직도 해석되지 못한 채 읽히지 않는 고전으로만 맴돈다.

앞으로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화두는 `협력과 창의'이다. 인공지능 시대는 협력 모드로 나아가야 한다. 물론 그 협력의 키워드는 독서 토론을 통한 창의적이고 확산적인 사고 함양이다. `나를 부자로 만든 건 책이었다'는 빌 게이츠의 고백에 동감하며 클로징 PPT로 로댕의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을 넣었다. 이십 대의 젊은 사업가가 벼랑 끝에서 뫼르소를 떠올렸듯이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파릇한 젊은이들이 절망을 만났을 때 독서라는 나침반으로 사유하며 인생을 힘차게 노 저어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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