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와 악의 평범성
반민특위와 악의 평범성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3.1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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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마침내 역사적 논쟁의 종지부를 찍게 됐다. 역설적이지만,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그 논쟁 종식의 주인공이 된 셈이다.

그는 지난 15일 열린 자기 당 긴급의원총회에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잘 해야 했었지만 결국 국론 분열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발언의 하루 전날에도 자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도 “해방 후 반민특위로 인해서 국민이 무척 분열했다”면서 “결국 우파는 곧 친일이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앞으로 이 정부의 역사공정이 시작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민특위의 무기력한 해산은 그가 말하는 진영논리로 편을 가름으로써 설득될 수 있는 일은 절대 아니다. 그나마 시도에 불과했던 반민특위 활동을 국론 분열로 표현하는 것은 나라 안의 공통된 의견, 즉 국론이라는 단어에서의 보편적인 나라(國)와는 결이 다르다.

반민특위는 일제 식민지 시절의 반역과 친일 행위에 대한 진상 규명과 처벌, 더 나아가 그 행위자에 대한 용서와 화합에 이르기까지, 깊고 넓은 나라와 민족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여태껏 갖가지 문제에 대한 철저한 원인 규명을 소홀히 하는, 그리하여 모순과 병폐, 그리고 적폐까지도 주저 없이 되풀이되는 전근대적 시대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소홀히 해 왔던 역대 정권의 무능과 무책임,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만 찬탈하면 된다는 정당의 논리는 반민특위의 무산에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그동안 <수요단상>을 통해 수차례 언급했다시피 반민특위는 이승만의 노골적인 비협조와 친일경찰의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방해로 이렇다 할 활동을 제대로 시도하지 못한 채 1년 만에 무산되고 말았다.

일제에 기생했던 숙주는 고스란히 살아났고, 오히려 나라와 민족의 진정한 독립과 자유, 그리고 정통성과 자주·자존의 공영을 목숨 바쳐 지키고자 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오히려 핍박을 받는 절름발이 나라의 모순은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기세등등하다.

“친일은 반성해야 하고, 독립운동은 예우받아야 한다는 가장 단순한 가치를 바로 세우는 것이 친일잔재의 청산”이고, “이 단순한 진실이 정의이고, 정의가 바로 서는 것이 공정한 나라의 시작”(문재인 대통령 3.1절 기념사에서)을 100년이 지나서야 강조해야 하는 만큼 그동안의 우리는 헛살았다.

2차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태인을 악랄한 방법으로 학살한 독일은 반인류적 범죄에 대해 지금도 반성과 처벌, 그리고 철저한 경계를 멈추지 않는다. 아르헨티나로 도망친 학살 실무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을 납치해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운 것은 단죄와 악의 고리를 끊겠다는 단호한 의지 일부에 불과하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 또한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이후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만들어 철저한 원인 규명을 통해 역사적 모순이 되풀이되지 않는 약속을 지켜나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시대적 모순은 청산되지 않은 친일·반민족에서 비롯된다. 일제에 빌붙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고 탄압과 고문은 물론 생명까지도 앗아갔던 무리들은 반공과 빨갱이로 몰아가는 프레임으로 연명해 왔고,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 원인 규명을 너무도 등한시해왔다.

민주화 운동의 성지 광주에서 처음으로 재판에 출석한 전두환이 국민에게 노출된 단 한 마디 “이거 왜 이래”라는 말은, 그 악의 축들이 보편적인 국민과 국가의 공통된 의견(국론)과 얼마나 먼 거리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나라는 자기들의 욕망과 권력, 그리고 독재적 점유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고, 백성은 소중한 생명과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지켜줘야 하는 주권재민의 대상이 아니라 오로지 지배와 착취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생각만 있을 뿐이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평범해 보이는 이들의 `생각하지 않는 행동'과 `무비판적 순종'을 「악의 평범성」으로 정리했다.

원인에 대한 처방 없이는 얼마든지 평범한 악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지금이 반민특위가 부활해야 하는 제대로 된 때가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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