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림
바림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19.03.04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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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몇 년 전 우연히 병풍 전시회에 갔다가 `평생도'를 봤다. 돌잔치부터 환갑잔치까지 인생살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열 폭 병풍 속에 그려져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이며 오밀조밀한 상황묘사가 재미있어서 한참 동안 들여다봤던 기억이 난다. 그해 주민자치센터에 민화강좌가 개설되었을 때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등록한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민화를 배우면서 느끼게 된 가장 큰 매력은 그림마다 담고 있는 의미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 뜻을 생각하며 그리다 보면 어느덧 기도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한번은 지인으로부터 그림청탁을 받았다. 옥색 여의주를 입에 문 용 그림을 사무실에 걸어두면 소원성취한다는 얘길 들었다는 것이다. 민화에서 용은 구름을 관장해 비를 내리게 하는 등 무소불위의 능력을 가진 상상 속의 동물이다. 나는 구름 속을 노니는 청룡과 황룡의 입속에 큼지막한 여의주를 하나씩 물려 `쌍룡도'를 그려주었다. 채색과 바림, 선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신경을 썼다. 특히 여의주를 바림 할 때는 입체감은 물론 내재한 강력함을 표현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었다. 그 마음이 배어들었던지 그림을 받아 든 지인도 무척 흡족해했다.

민화에 푹 빠진 또 하나의 이유가 바림이었다. 바림은 민화의 대표적인 표현법 중 하나로 그라데이션과 비슷한 효과이다. 바림붓에 깨끗한 물을 적셔 채 마르지 않은 물감의 가장자리를 쓰다듬듯 풀어주면 자연스럽게 퍼지면서 농도가 서서히 옅어지게 된다. 명암을 나타내거나 부드럽게 이중 색을 표현할 때 주로 쓰는 기법이다. 한 면 안에서 서로 다른 두 색이 제 빛깔을 간직한 채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는 것, 최고의 시너지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민화의 꽃은 바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환상적인 바림을 위해서는 `기다리는 일'과 `때를 놓치지 않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바탕색을 칠하고 잘 마르기를 기다려야 하며, 채색한 물감이 아직 물기를 품고 있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섣부르게 덜 마른 밑 색 위에서 붓질하면 색끼리 섞이게 되어 이중 색이 안 나오고, 채색한 물감을 방치하여 말라버리면 뒤늦게 바림붓을 갖다 댄들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바림을 잘못하면 보기 싫은 얼룩이 생기기도 한다. 금방 알아차리면 다행이지만 이미 말라버린 후라면 그 흔적을 지우기가 어렵다. 진한 색으로 한 번 더 바림을 해 덮어 보거나, 얼룩대로 다른 연출을 시도해볼 수는 있겠지만,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때는 얼룩이 너무 치명적이어서 더 그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질 때도 있다. 그럴 땐 일단 접어두고 시간이 흐르길 기다린다. 나중에 다시 펼쳐보면 가끔 해결방법이 떠오르기도 하니까.

요즘 들어서는 사람을 만나는 일도 민화처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진실한 마음 바탕 위에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세심한 관심과 배려로 바림 해나간다면 얼룩 없이 아름다운 관계를 그려갈 수 있지 않을까. 늘 가슴 한가운데에다 촉촉한 바림붓을 준비해둬야겠다. 사는 동안 희로애락이 멋지게 녹아든 인연 몇쯤은 간직하고 싶다.

오늘도 망친 그림을 꺼내 보듯 미완으로 접어두었던 몇몇 관계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결국, 도로 접지만, 앞으로도 고민은 숙제처럼 계속될 것 같다. 언젠가는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겠지. 혹 시간이 더 많이 지나가면 희미해지기도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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