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속에서 찾은 구석기인의 삶 - 청주 복대동 유적
폐허 속에서 찾은 구석기인의 삶 - 청주 복대동 유적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9.03.03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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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1975년 6월 완공된 대농 청주공장은 2004년 12월 대농 역사의 막을 내릴 때까지 30여 년간 청주지역 최대사업장이며 동양 최대의 방직공장임을 자처하며 오랜 기간 명성을 유지하였다. 근로 인력 6~7,000명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1977~1978년 산업체부설학교인 양백여자중학교와 양백여자상업고등학교를 설치하였다. 미호천 지류인 석남천이 북서쪽으로 휘감아 흐르는 언저리에 솟은 해발 50m의 독립된 낮은 능선이 자리한 곳이다. 이 능선의 북쪽 사면부는 양백여자상업고등학교 건물신축으로 평탄화된 상태이고, 남쪽 사면부는 배수관 설치 공사로 2~3m 깊이로 길게 파여져 있었다. 북쪽과 서쪽은 운동장 조성과 깊은 구덩이로 퇴적층이 깎여나갔다. 이처럼 학교 건물이 들어선 능선은 본래의 지형모습을 찾아볼 수 없이 크게 훼손된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양백여자상업고등학교 본관 건물터에 일부분 구석기인들의 생활면이 남아 있었다. 2007년 봄에 폐허나 다름없던 이곳을 발굴조사하여 시기를 달리하며 형성된 2개의 구석기시대 문화층을 찾았다. 구석기인들의 생활터가 현대의 배움터를 조성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그 속에 약 25,000년 전 현생 인류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역사가 지닌 생명력이다.

이 능선 하부에는 갱신세(新世) 시기에 석남천이 범람하면서 쌓인 하천퇴적층이 있고, 그 위로는 능선에서 퇴적물이 이동하여 쌓인 사면붕적층이 퇴적되어 있다. 미호천, 석남천의 잦은 범람과 환경변화 흔적이 자연퇴적층에 담겨 있고, 그 속에 구석기인들이 남긴 다양한 석기들이 보존되어 있다. 석기는 자연적으로 부스러진 돌이 아니라 사람이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348점의 석기가 복대동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이들 석기는 복대동 석남천 언저리에서 구석기인들이 삶을 꾸렸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이다. 출토석기는 제작방법, 크기, 형태 등의 차이와 기능에 따라 분류할 때 석기제작과정에서 생산되는 몸돌, 겪지, 노둣돌, 조각 등이 93.6%를 차지한다. 또한, 되맞는 석기가 10개체 26점이 확인된다. 이밖에 짐승사냥과 해체에 사용되는 찍게, 자르게, 여러면석기, 긁개 등과 가죽이나 뿔, 뼈 등을 가공하는 데 쓰인 주먹대패, 밀개, 뚜르개, 홈날 등의 석기가 약간 출토되었다. 이러한 석기구성과 특징으로 볼 때 복대동 유적은 석기제작 행위가 중심을 이루며 짐승사냥과 해체작업이 이루어졌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석기제작에 사용된 돌감은 대부분이 석영맥암이다. 석남천 주변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돌감이다. 석기제작을 위해 먼 곳에서 재료(돌)를 구하여 운반하지 않고 주변의 자원을 적극 활용한 지혜를 엿보게 한다.

한편 대규모 방직공장이 있었던 공장터는 공장설립과 오랜 기간 공장운영으로 본래의 지형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지하시설물설치를 위해 파낸 구덩이 주변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던 구석기층을 찾았고 987점의 석기를 발굴하였다. 파헤쳐진 흙더미 속에서 찾은 석영맥암제 석기 몇 점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 것이다. 4만 5천 년 전 구석기인들의 삶의 흔적이다. 현재의 지웰시티 아파트단지 일대는 중기 구석기~후기 구석기시대인들의 주된 생활터였음이 고고학 발굴로 밝혀진 것이다.

청주 복대동 유적은 4만 5천 년 전과 2만 5천 년 전에 구석기인들이 처음 삶의 터전으로 삼았고, 1970년대 이후에는 생산과 배움의 공간으로, 오늘날에는 대단위 주거공간으로 바뀌었다.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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