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의 리더십
최명길의 리더십
  • 김규섭 청주시 문화예술과 팀장
  • 승인 2019.02.26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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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규섭 청주시 문화예술과 팀장
김규섭 청주시 문화예술과 팀장

 

청주 북이면 대율리에는 전주 최씨 집성촌이 있고 최명길의 종택이 있다. 종택과 가까운 곳에 그의 묘소가 있다. 최명길, 그 시대의 지식인들과는 신념이 달랐던 사람, 가슴으로 백성을 사랑했던 사람 아니었던가. `지천최공명길지묘'라고 쓰여 있는 묘지석을 바라보니 얼마 전 보았던 영화 `남한산성'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1636년 음력 12월 9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청의 기마병이 질풍같이 남하한다. 병자호란의 시작이었다. 강화도 피난길이 막히자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한다. 대책 없이 맞이한 병자호란, 남한산성은 몹시도 춥고 배고픈 곳이었다. 병력은 1만여 명에 불과했고, 비축된 군량으로는 겨우 한 달 반 정도를 버틸 수 있었다.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안에서는 하루하루 절망감이 깊어만 갔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지 47일이 되던 날,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 세 번 큰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이었다. 최명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항복식이 끝나고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궁궐로 돌아온다. 폐허가 된 궁궐은 어지러웠다. 인조와 신하들의 행렬이 창덕궁으로 들어가던 중 최명길이 뒤를 돌아 관객들을 응시하며 궁궐문이 닫힌다. 그리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병자호란은 17세기 초 패권국이었던 명과 신흥강대국 청의 대결, 이른바 명청교체의 불똥이 한반도로 튀면서 일어났던 전쟁이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엄혹했다. 7년 동안 한반도를 할퀴고 간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기도 전에 명과 청의 패권 다툼 속으로 또다시 휘말려 들었다. 청의 도전에 밀리던 명은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을 빌미삼아 조선도 나서서 청에 맞서라고 압박했고, 청은 조선에 중립을 요구했다. 그야말로 조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몰려 있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했을까. 그 당시 분명한 사실은 조선은 명과 청을 움직일 수 있는 지략이 없었고, 청의 침략을 감당할 힘도 없었다.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자위능력이 없었던 조선은 외교와 내정에서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유연하게 행동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조선은 그렇지를 못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정묘호란 때처럼 유사시 강화도로 들어가 항전하겠다는 계획이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최명길은 `나라가 망하더라도 오랑캐와 타협할 수 없다'는 명분론이 지배적이었던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거스르며 `조선의 생존과 백성의 보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국경에서 싸워 백성의 피해를 최소화하자고 했고, 전쟁이 발발하자 목숨 걸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었다. 항복 이후에는 나라와 백성의 아픔을 다독이려고 노심초사했다. 최명길은 현실론을 바탕으로 책임감과 희생정신, 그리고 대안까지도 제시할 줄 알았던 조선의 뛰어난 전략가였다. 기존의 패권국이 쇠퇴하고 새로운 강대국이 떠올라 그에 도전하는 세력이 생길 때 한반도는 어김없이 위기를 맞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청일전쟁이 그랬다.

이런 역사를 되돌아볼 때 우리는 강대국들의 일방적인 힘의 논리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자강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냉철한 현실인식과 민완한 외교능력, 그리고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유연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밖에서는 신흥강대국 중국이 떠올라 패권국 미국에 도전하고 있고 안에서는 갈등과 분열이 심화하고 있는 오늘, 최명길과 같은 리더가 새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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