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기미독립선언서 서명한 충청권 종교인 민족대표는 누구?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 서명한 충청권 종교인 민족대표는 누구?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9.02.2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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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종일, 한용운, 권병덕, 손병희, 신석구, 신흥식, 정춘수
(왼쪽부터) 이종일, 한용운, 권병덕, 손병희, 신석구, 신흥식, 정춘수

 

1919년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는 33인이다. 천도교 15인,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이 참여했다. 충청지역에서는 손병희, 한용운 등 7명이 민족대표로 참여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다. 민족대표 33인 유족회가 공개한 충청권 민족 대표 종교인을 소개한다.

# 충남
△이종일(1858~1925·천도교·충남 태안)=천도교회월보 월보과장을 지냈다. 3·1 운동 당시 보성사에서 3만5000부의 독립선언문을 인쇄했다. 3·1운동 때는 자신이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이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2년 반 만에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에 취임, 한글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했다.

△한용운(1879~1944·불교·충남 홍성)=신흥사 승려였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해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 일을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 충북
△권병덕(1868~1944·천도교·청주 청원)=천도교 종리원의 서무과 주임, 선도사 등을 지냈다. 충북 청원에서 태어났다.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 때 손병희와 함께 6만여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해 진압당한 후 전국 각처를 방랑했다. 1908년 천도교에 입교, 전제관장을 역임했다.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손병희(1861~1922·천도교·청주시 청원구)=천도교 3세 교주였다. 선생은 3·1 독립선언을 앞두고 천도교 간부들에게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라는 말을 했다. 선생은 독립선언식 이후 체포돼 2년여 옥고를 치렀다.

△신석구(1875~1950·개신교·청주시 청원 미원면 금관리)=남감리교 목사를 지냈다. 민족대표로 참여한 것은 물론 영남에서 독립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창녕지방 영산의 24인 결사대에 서울의 독립운동계획을 계속 연락해 줌으로써 창녕의 전 국민이 일제히 봉기하여 무장투쟁을 하는데 지도적 역할을 했다.

△신홍식(1872~1937·개신교·청주시)=북감리교 목사였다. 감리교 목사로 충남 공주에서 포교를 시작해 1917년 평양 남산현교회로 전임됐다. 이곳에서 3·1운동 계획을 듣고 적극 가담, 3·1 독립선언서에 기독교 대표로 서명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춘수(1875~1951·개신교·청주)=남감리교 목사를 지냈다. 원산 남촌동 교회 목사로 재직하던 중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1934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서대문경찰서에서 105일 동안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친일 활동에 나서면서 친일인사에 포함됐다.

/김금란기자
silk8015@cc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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