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足足 나라사랑·조국사랑 `새록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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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9.02.20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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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 충북지역 역사나들이 장소
손병희, 이상설, 신채호
손병희, 이상설, 신채호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나라의 소중함, 조국의 소중함을 깨닫는 역사 나들이만큼 살아있는 교육은 없다. 자녀와 함께 떠날 수 있는 역사 나들이 장소를 소개한다.

# 의암 손병희 생가(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의암로)

의암 선생(1861~1922)은 갑오동학농민전쟁, 갑진개화혁신운동, 3.1독립만세운동 등 개혁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청주시 자료에 따르면 선생은 일찍이 동학에 귀의해 동학혁명을 이끌다 교주 최시형이 처형되자 제3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포교와 민족부흥 및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1919년 3·1 운동 시 독립선언문에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천도교를 대표해 서명, 낭독했다. 이후 일제경찰에 체포돼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뒤 요양하다 1922년 62세로 생을 마쳤다.

3만8577㎡의 부지 위에 건립된 선생의 유허지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돼 있다.



# 보재 이상설 생가(진천군 진천읍 이상설안길)

이상설 선생((1870~1917)은 진천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진천향토문화백과에 따르면 선생은 조선 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해 춘방시독관에 제수됐고, 비서감비서랑, 성균관교수·관장, 법부협판, 의정부참찬을 지냈다.

1904년 6월 박승봉과 연명으로 일본인의 전국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침략성과 부당성을 폭로하는 `일인요구전국황무지개척권불가소'를 올렸고, 고종은 이 상소를 받아들여 일본의 요구를 물리쳤다.

1906년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 그해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신학문과 항일 민족교육을 했다. 1908년 2월부터 1909년 4월까지 미국에 머무르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지원을 호소했다. 그는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해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기 위해 1910년 6월 유인석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을 편성했다. 선생은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7년 3월 니콜리스크에서 눈을 감았다.

선생의 생가는 충북도 시도기념물 제77호로 지정돼 있다.

(위) 손병희 생가, (아래 왼쪽) 신채호 사당, 이상설 생가


# 단재 신채호 사당(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길)

단재 선생(1880~1936)은 일제강점기시대 독립운동가였다.

선생은 20세에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황성신문의 기자로 논설을 쓰며 불법적인 을사조약 체결을 단호히 배격했고 1910년 해외에 망명한 후 본격적으로 국사 연구에 힘써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등의 저서를 남겼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수립 후에는 의정원 전원위원장으로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였고, 1929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여순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순국했다. 단재 사당과 묘소는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됐다.

/김금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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