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밝이술, 그리고 도시농업
귀밝이술, 그리고 도시농업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2.19 20: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월대보름이 어제 지났다. 이 말에는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는 숨은 뜻이 있다.

달이 가장 커지는 정월대보름에는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는 여러 가지 풍습이 있다. 하루 전인 열나흗날 저녁부터 오곡밥과 갖가지 나물 반찬을 만들어 풍성하게 먹는 것이 우선 손꼽힌다. `나무 아홉 짐과 오곡 찰밥 아홉 그릇을 먹는다'는 속담대로 자기 집 밥뿐만 아니라 여러 집의 밥을 먹는 것이 좋다는 속설이 있다. 쥐불놀이와 달집태우기, 지신밟기 등의 공동체 놀이를 비롯해 부럼깨물기, 귀밝이술 등의 세시풍속은 지금 생각에도 흐뭇하고 넉넉하다.

정월대보름의 갖가지 세시풍속은 대부분 경제와 맞물려 있다. 가장 중요한 경제 활동인 한 해 농사의 풍요를 위한 기원과 결의의 속뜻이 그 풍습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말하자면 본격적인 노동의 시작을 알리는 한바탕 축제인 셈이다. 긴 겨울 농한기를 잘 쉬었으니 풍악을 울려 농사에 대한 전의(戰意)를 다지는 정월대보름 축제는 고단한 노동에 앞선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의 전형이 아닌가.

귀밝이술은 정월대보름 아침에 차고 맑은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는 뜻에서 비롯된 풍속이다. 잘 듣겠다는 것은 지극히 이타적인 행위이다. 말을 함부로 하기 전에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으로 세상의 이치를 헤아려 나가겠다는 것인데, 거기에는 땅의 소리를 비롯해 풀벌레와 온갖 날짐승과 들짐승의 소리, 바람과 빗소리까지 아우르는 대자연과의 조화가 있다. 물론 지배계층의 지시를 놓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행해야 한다는 고압적 권주(勸酒)의 의미 또한 정월대보름의 귀밝이술에는 담겨 있겠다.

그럼에도 경계 없이 난무하는 온갖 막말과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희생과 고통을 폄훼하는 말에 의한 상처는 전혀 아랑곳없는 세태에 귀밝이술 한 잔이 갖는 깊은 속뜻을 헤아려 줬으면 하는 염원은 차라리 무모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조상들은 정월대보름 귀밝이술을 맑은 술로 차갑게 마셨다. 귀밝이술은 정해진 날에 청주(淸酒)로 빚는 시양주(時釀酒)인데, 이 술을 마시면 귀가 한층 밝아지고 총명해지며, 일 년 동안 좋은 소식만 듣게 된다고 믿어 왔다.

우리 고장 전통주 신선주를 계승하는 일에 고군분투하는 박준미씨에게 물었더니 24절기를 가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기일에 맞춰 술을 빚는 `정성'의 비법이 있다고 알려준다.

정월대보름은 비장한 신심(?心)과 풍요에 대한 기원의 절정이다. 농업사회에서 적절한 때를 갖춰 행할 것은 행하고 금할 것은 금하는 24절기의 세시풍속과 더불어, 설날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경건함과 간절함이 축제와 놀이를 통해 한꺼번에 용트림하면서 본격적인 노동의 시작을 결의하는 것이다. 거기에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서로 협심하는 공동체의 결합에, 제각각 의미 없이 난무하는 막말과 혐오, 그리고 부정과 왜곡의 말들은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다.

우리의 세시풍속에는 이토록 심오한 슬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데, 이런 소중한 가치가 오는 5월 청주에서 열리는 제8회 대한민국 도시농업박람회에 알차게 담겼으면 좋겠다. `생명도시! 농업을 만나다'를 슬로건으로 정한 이번 도시농업박람회를 통해 조상의 슬기가 듬뿍 담긴 24절기의 특색을 킬러 콘텐츠로 삼을 수 있겠다. 입춘에는 캘리그라피를,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르는 우수를 상징하는 작은 물레방아 만들기 체험, 경칩에는 개구리 캐릭터와 동요대회,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에는 균형감각 오래 버티기 대회 등 상상만으로도 풍성하고 다양하며 특색 있는 전시와 체험행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뿐인가. 망종의 세시풍속인 보리이삭줍기와 보리그스르기, 프랜차이즈 음식점의 동지 팥죽 등 잊혀지고 있는 세시풍속을 되살리며 `도시와 농촌의 만남을 통한 새로운 문화 창출', `상생과 공존', `도시민의 힐링과 치유 등 가치 재발견'을 풀어내는 전통의 콘텐츠는 풍부하다.

귀담아듣는다는 것은 창조의 시작이다. 잘 들어야 잘 놀 수 있고, 잘 노는 것이 커다란 장점이자 덕목인 시대로 가고 있다. 호모루덴스가 쓸데없는 말은 들리지 않는 귀밝이술을 만들 것 같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