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졸업은 없다
인생의 졸업은 없다
  • 전영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9.02.1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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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전영순 문학평론가
전영순 문학평론가

 

졸업 시즌이다. 졸업식이 있는 날에는 유난히 날씨가 춥다. 아들 졸업식 날도 예외가 아니다. 아들은 애국지사라도 된 양 만세 삼창을 하고 먼저 학교에 갔다. 외손자 졸업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가까이 사는 노모는 본인도 축하하러 가겠다고 성화시다. 안 가도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기어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따라나선다.

세월 따라 졸업 풍경도 많이 변했다. 졸업식장에는 학생과 가족 중 한 사람만 의자에 앉을 수 있다고 통보를 받았다. 아들 옆에는 엄마란 특권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날도 차고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노모는 차 안에, 아이 아빠는 남자란 이유로 식장 뒤에서 떨고 서 있다. 아들 옆에 앉아 있으니 벼슬을 한 것처럼 기분이 좋다. 여자 친구를 부모보다 우선으로 옆에 앉혀놓은 학생들도 보인다. 눈이 마주칠 때 `깜찍한 녀석'하고 미소로 응대했다. 졸업식은 형식적인 것은 거의 생략하고 이 학교 선배인 첼리스트가 악기에 대한 설명과 공연으로 1시간가량 진행되었다. 학생들에게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을지 모르지만, 훗날 추억담으로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졸업식장은 축하객들로 가득 찼는데도 춥다. 예전보다 시설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사회적 변화에 비추어본다면 청춘의 꿈을 펼치기에는 턱없이 열악한 환경이다. 학교 규모나 시설, 주위 환경을 살펴볼 때, 잘 참고 견뎌준 아이들이 대견해 보인다. 예전에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인재가 많이 나왔다고는 하나 시대가 변화한 만큼 그 시대상에 맞게 환경도 교육도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친정엄마가 기를 쓰고 따라온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어깨너머로 한글은 깨쳤어도 졸업장은커녕 교문도 들어서지 못했으니 친정엄마에게 있어 졸업은 대단한 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애틋한 졸업 장면을 경험했으니 이해가 간다. 불과 40년 전, 시골 초등학교 졸업식장은 울음바다였다. 졸업식 반주가 흘러나오고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하면 여기저기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할 때는 목이 메어 노래를 따라 하는 학생이 몇 명 안 되었다. 아무리 참으려고 이를 앙 물어도 울보인 나는 그만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그때만 해도 시골에서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산업체 학교로 편승하는 어린 여학생들이 다반사였다. 심지어 초등학교도 못 다녀 식모살이하러 도시로 나간 언니들도 몇 있었다. 지독하게 간난에 시달렸던 산골 오지에서 여학생이 중학교를 꿈꾼다는 것은 사치였다. 당시 방직공장에 다니다 명절 때 내려온 큰집 숙이 언니는 교복 입은 학생들이 제일 부럽다고 했다. 나는 가무잡잡했던 숙이 언니가 뽀얀 얼굴로 내려온 것이 부러워 나도 공장에 갈까도 생각해 본 날이 있었다. 중년인 내가 지난날을 생각하며 격세지감을 느끼다니 세월이 유수 같다는 말이 이렇게 흘러가나 보다.

교육은 백년대계라 할 만큼 우리의 미래가 달린 문제이다. 친정엄마와 같이 배움에 대한 갈망을 풀어보라는 방안인지 요즘은 교육부가 아니더라도 일정한 과정만 밟으면 졸업장과 수료증, 자격증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나 단체가 많다. 해서 노인대학을 비롯해 평생교육을 하라고 평생교육원이 생겼나 보다. 인생의 과정이 있을 뿐 졸업은 없다.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기에 죽을 때까지 배움의 자세로 살아야 한다. 사제지간에 부모가 개입하면 교육은 방향성을 잃고 길을 헤매기 쉽다. 아이를 맡아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께 감사하라. 선생님의 자질은 훗날 학생이 평가한다. 아이들을 탓하지 마라. 나는 아이들 교육보다 어른들 인성 교육 먼저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내 인생의 졸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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