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날에
보름날에
  • 임현택 수필가
  • 승인 2019.02.18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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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
임현택 수필가

 

상원(上元)이라고 하는 대보름, 보름을 앞두고 재래시장에 갔다. 재래시장은 뭐니 뭐니 해도 덤이 최고다. 청주 육거리시장은 언제나 생동감 넘치는 삶이 느껴지고 에너지로 활기찬 시장은 서로 흥정하면서도 손님이 알아서 덤을 담아가도 껄껄 웃어넘기는 이곳, 주인 양반이 앉은뱅이저울의 눈금이 제자리 잡기도 전에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봉지를 휙 잡아들고 한 줌 얹어주는 덤은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시장 중앙로 붉은 앞치마를 두른 난전의 남성, 예쁘고 젊다는 말치레로 호객행위인 줄 알면서도 절로 발걸음 가볍게 향하는 건 나도 여자임을 상기하게 한다. 명절 대목장 못지않게 북새통인걸 보면 정월대보름 명절을 실감한다. 부럼용 호두, 땅콩, 밤은 물론 곰취, 호박곶이, 고사리 등 말린 나물과 오곡밥의 화려한 잡곡이 좌판 위에 반들반들 먹음직스럽게 빛나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이 보름에 천천정(天泉亭) 행차 시,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자, 기사(騎士)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명했다. 가는 도중 기사가 돼지싸움을 구경하다가 까마귀의 행방을 놓쳐버렸다. 이때, 못 가운데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전해주었는데 겉봉에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안 열어보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상히 여겨 그 봉투를 왕에게 전하자, 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열어보지 않으려 하였으나 일관(日官)이 “두 사람은 보통사람이고 한사람은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니 열어보셔야 합니다.”고하자 봉투를 열어보자`거문고 갑[琴匣]을 쏘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활로 거문고 갑을 쏘았는데 그 안에는 왕비와 정을 통하던 중이 있었다. 그 중은 장차 왕을 해치려고 숨어 있던 차, 왕은 중과 왕비를 함께 처형하였고 이 일로 매년 정월 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으며, 그 못을 서출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년시절, 정월대보름이면 어른 아이 모두 잔치였다. 풍물을 울리면서 집집이 지신밟기는 물론 마을회관 앞에서 진종일 윷놀이하면서 보름 잔치를 벌였다. 우린 빈 깡통을 둥그런 나무에 끼워 못을 박아 구멍을 내 철삿줄로 끈을 만들어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보름달이 떠오르면 소원을 빈다고 모두가 눈을 감고 빌던 그 시절, 눈 둑에 서서 손이 벌게지도록 쥐불놀이를 하다가 마지막 깡통을 공중으로 휙 던지면, 마치 불꽃놀이처럼 불똥이 공중에서 유성처럼 떨어지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좋아했다.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 하여 잠을 참으며 보름밤 지키기에 안간힘을 썼지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눈꺼풀인지라 잠이 들고, 어른들은 자는 아이 눈썹에 쌀가루나 밀가루를 발라놓고 놀려주곤 했다. 그때는 왜 그리 더위팔기에 열심히 엮던지 친구들이 이름을 부르면 대답 대신 `내 더위 사가라'고 고함을 지르며 더위팔기에 바빴고 혹여나 더위를 팔지 못하면 더위를 먹는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정월대보름이면 장독마다 떡이 놓여 있었고 부엌 부뚜막엔 밥과 반찬이 있었다. 보름날 아이들이 밥과 반찬을 훔쳐다 먹는 풍속이 있었기에 어머니들의 후덕한 인심이 엿보였고, 우린 나눠 먹는 교훈도 배웠다. 그때 모여서 우묵한 양푼에 숟가락 부딪치며 보름나물로 비벼먹던 그 맛과 향, 깡통 하나면 밤새도록 쥐불놀이를 하고 더위를 팔던 그때가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세시풍속이 흑백사진처럼 점점 사라지고 이젠 추억의 영상으로 마치 영화처럼 기억 속에 남을 것만 같다. 오곡밥, 부럼, 나물재료를 양손 무겁게 들고 `설은 질어야 풍년이고, 보름은 맑아야 풍년이다'라는데 올 보름엔 휘영청 둥근 보름달을 볼 마음에 발걸음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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