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의 희생자 박광우 선생 묘소 앞에서
사화의 희생자 박광우 선생 묘소 앞에서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9.02.18 20: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조선시대 많은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사건들 가운데 `사화' 만한 사건도 없을 것이다. 5번의 사화는 모두 전혀 다른 원인과 전개 과정을 보인다. 그러나 모두 사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해서 `사화(士禍)'라고 부른다.

가장 먼저 일어난 `무오사화'는 국왕과 일부 대신들이 김종직 일파를 명분으로 삼사에게 경고한 사건이었고,`갑자사화'는 국왕이 신하 전체를 대상으로 자행한 극한적 폭력이었다. 그리고 `기묘사화'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기묘사림의 급진적 개혁정치를 정지시키기 위한 국왕과 대신들의 전격적인 숙청이었다. `을사사화'는 기본적으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거기에는 외척이 깊이 개입했다. 명종의 즉위(1545년) 직후 시작된 을사사화는 2년 뒤 `정미사화'까지 지속된 장기적인 정치 투쟁이었다.

가슴 아픈 이 `사화'의 희생자 묘소가 우리 고장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수대리에 있다. 청주에서 대전가는 길을 따라 남청주나들목 방향으로 가다 보면 남이초등학교가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쪽 수대리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야트막한 언덕 아래 잘 조성된 묘소가 바로 조선 중기의 문신 박광우 선생의 묘소다. 이곳 묘소에는 묘표를 비롯하여 사적비 및 상석, 동자석, 장명등, 문인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987년 3월 3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고, 상주 박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박광우(朴光佑, 1495~1545) 선생의 본관은 상주이고, 자는 국이(國耳), 호는 필재(畢齋) 또는 잠소당(潛昭堂)으로 부른다. 돌아가신 후 부르는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선생은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으며, 1525년(중종 20)에 문과에 급제하여 재령군수를 거쳐, 강릉부사와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강릉부사로 있을 때는 선정을 베풀어 당시 강릉의 주민들이 세운 `부사박광우거사비'가 강릉 향교 보호각에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학문적으로도 인정받아 `동국여지승람'편찬에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를 모색하는 사림들과 함께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유배 도중에 장독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 선생을 특별히 존경하던 율곡 이이의 상소로 복관되어, 청주시 오창읍 양지리 사액서원인 송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선생의 묘소는 본래 경기도 파주시에 있었던 것을 196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는데, 이때 나온 관곽과 유물들이 일괄 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봉분 바로 앞에 상석이 있고, 왼쪽에 있는 묘표는 1687년(숙종 13) 송시열 선생이 지었다. 이외에도 최근 조성한 사적비와 장명등, 그리고 원래 파주의 묘소에 있었던 문관석과 동자석, 망주석을 옮겨 설치하여 지금에 이른다.

박광우 선생의 묘소 앞에 서면 “나랏일이 몇 사람의 뜻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널리 여론을 수집하고, 유교의 가르침을 잘 새겨 정치를 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조광조 선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백성이 하늘이라는 생각으로 유교적 이상 정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걸었던 박광우 선생의 기개가 느껴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