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만든 좌표와 가치는 어디로 갔나
새로 만든 좌표와 가치는 어디로 갔나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9.02.17 18: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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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 산하에 `좌표와 가치 재정립 소위원회'라는 기구가 있었다. 위원장을 맡았던 홍성걸 국민대 교수의 말처럼 “그동안 보수가 지향해온 좌표와 지키고자 했던 가치 가운데 시대적 소명을 다한 것들은 버리고, 국민과 시대의 요청에 부합하는 새것들로 채워 넣자”는 것이 설치 목적이었다. 지난해 7월 출범해 두 달여 동안 활동했다.

이 소위는 활동을 결산하며 한국당이 추구할 6대 핵심가치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주의, 국가안보, 공동체 통합, 긍정의 역사관을 꼽았다. 6대 혁신가치는 국가도덕성, 국민성장, 정의로운 보수, 따뜻한 사회, 준비된 미래, 당당한 평화를 설정했다.

5개월이 지난 지금, 한국당은 새로운 좌표를 발판삼아 새로운 가치들은 구현해가고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렇다고 긍정하는 국민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최근 당의 행보를 보면 보수 재건의 의지가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북미 정상회담에 주눅이 들어 전당대회 날짜를 놓고 갑론을박하던 모습에서는 제1 야당으로서 최소한의 자존감도 보이지 않았다. 극우세력인 태극기 부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에서 새로운 가치로 설정했다는 `준비된 미래'는 무색해졌다. 당대표 출마를 선언했던 8명 중 5명이 불참으로 돌아섰다. 불리한 판세가 확인되자 차례차례 후보 사퇴를 하는 구차한 행렬에서는 당이 3대 실천원칙으로 정했다는 책임성도 진정성도 보이지 않았다. 5.18 망언 사태는 당이 새로운 가치라고 꺼내 들었던 `긍정의 역사관'과 `공동체 통합'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바닥을 쳤던 지지율이 오르기는 했다. 결국 독이 됐지만 말이다. 얼마 전 당 중진의원이 방송에서 “여권에서 악재가 잇달아 터지고 있지만 한국당의 대응이 산만하고 체계가 없다”는 지적을 받고는 이렇게 말했다. “자고나면 새로운 문제가 터져 나오니 어디에 집중하고 어떤 전략을 짜야할 지 생각할 시간이 없다”. 이 행복했던 고민에 지지율 반등의 해답이 담겨 있다. 한국당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당의 부진과 잇단 자충수에 기인한 바가 크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상승세마저도 여당이 차려준 밥상을 걷어차는 자살골로 인해 단숨에 꺾여 버렸다. 공부를 하지도 않았는데 시험석차가 올랐다면 이유를 돌아봐야 한다. 상대가 나보다 더 나태해서 올린 성적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그 성적표를 과신하고 오만을 부리다가 역풍을 맞은 것이 지금 한국당의 처지다.

그런데도 국민이 자유한국당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제1야당에 맡겨진 역할의 중대성 때문이다. 의석 113석에 달하는 한국당은 당세가 집권당 못지않은 거대 정당이다. 입법부를 이끌어 갈 두 축의 하나이자, 견제와 보완의 기능을 통해 일정 부분 국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 제2의 대의 세력이다. 이런 야당이 유권자 눈 밖에 나 장기간 신뢰를 얻지 못하면 여당이 자만에 빠진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한국당 지지율이 최근 들어 상승세를 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집권 세력 곳곳에서 감지되는 독선적 징후에 유권자들의 견제 심리가 발동했고, 현실적 대안이 될 수밖에 없는 한국당이 반사이익을 누린 것이다. 그러나 한국당은 유권자의 합리적 선택에 가장 비합리적 방식으로 대응함으로써 돌아온 지지자들에게 다시 좌절을 안겼다.

좌표와 가치 재정립 소위원회의 마지막 발표문은 이렇게 시작됐다. “한 줌 남짓의 지지 세력에 기대어 기득권을 지키려는 모습이 지금 한국당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솔직히 말해 한국당은 이 지점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의 옥중 메시지에 전대 후보들이 화들짝 놀라고 배박(背朴) 논란까지 벌어진 장면은 한국당의 답보를 고스란히 대변한다. 보수 재건의 씨앗으로 삼고자 새로 정립했던 좌표와 가치가 공염불에 그쳤음을 자인한 장면이기도 하다. 당시 소위의 발표문은 “무엇보다 성찰과 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주문으로 끝났다. 한국당은 이 문구로 돌아가야 미래를 밝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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