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소비하는 방법
역사를 소비하는 방법
  •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 승인 2019.02.17 18: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여느 해의 3·1절과 다르지 않지만 100주년이라는 의미는 새롭다. 100년 전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노력은 가히 열풍이라 부를 만하다. 좌우의 경계도 없다. 지난 정부 시절 건국절 논란을 극복하려는 의지도 엿보인다.

우리 지역도 다양한 행사가 기획되고 있다. 적지 않은 예산이 기관과 단체마다 배정되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역사를 기억하려는 노력들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기억할 만한 장소가 많지 않다. 삼일운동을 기억하는 장소로 고정된 삼일공원이 있긴 하다. 우리에겐 1980년 8월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 6인의 동상을 세워 만든 공원으로, 1996년 반민족행위자 정춘수의 동상을 끌어내린 사건과 2010년 새로이 공원으로 꾸민 장소로 익숙하다.

그러나 이마저도 옛 일본의 신사가 있던 곳이다. 처음 일제강점기에 신사가 세워진 곳은 지금의 당산 꼭대기였다. 하지만 오르내리기 힘들다는 이유로 명장사 자리로 옮겼다. 최근 위압적인 건물이 들어서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 대웅전에 오르던 계단은 신사 그대로였다. 1936년 신사 앞에 사찰이 들어서면서 다시 대한불교수도원 자리로 옮겼다. 지금도 남아있는 정문 계단은 옛 신사의 입구였으며, 1976년 노임소득 사업으로 순환도로가 놓이기 전까지 더 아래쪽으로 계단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곳 신사 사진을 보면 삼일공원 자리에 희끗한 높은 탑과 신사와 연결된 통로가 있었다. 탑의 용도를 알 수 없으니 반드시 신사와 관련되었다고 특정할 수 없으나 혐의 있는 공간을 우리가 애국지사를 기억하는 장소로 재활용하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틀림없다.

이것뿐일까. 일제가 주권을 침탈한 후 제일 먼저 훼손한 사직단엔 청일 러일 전쟁 때 전사한 일본군을 위한 위령 시설을 만들었다. 조선의 상징을 말살하려는 의도였다. 당산에 신사를 만든 후 여기를 다시 서공원으로 만들어 유흥의 장소로 탈바꿈했으니 식민지 정책을 절감할 수 있다. 해방 후 여기에 다시 충혼탑을 만들었으니 시대와 국적을 달리하는 중첩된 추념의 공간이다.

하필 옛 역사를 기억하는 장소로 아래를 굽어보는 높은 장소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곳에 권위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고, 오늘까지 거기에 기댄 권력이 없지 않을 것이다. 최근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활용을 전제로 한 문화행사가 다채롭다. 과거 문화유산이 보존에 그쳤다면 오늘날 문화재는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재인식되고 있다. 그리하여 문화재 생생사업에서 야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자가 전통시대의 문화유산을 기반으로 한다면 후자는 근대문화유산이다. 곧 일제강점기의 건축문화재를 활용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문화유산은 곧 압제와 수탈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그런 공간에서 시대를 즐기고 체험하는 활용이라니, 일제강점기의 밤거리는 낭만적일 게다. 어쩌면 이런 사업 속에 숨어 있는, 일제가 조선의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식민지 시혜론과 다름 아니다.

문화관으로 알려진 구 도지사관사는 오늘날 시민에게 개방되어 문학과 예술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덩그러니 놓여 있는 옛 청주역은 어떤가. 옹색한 탓에 문화기반시설 공간으로 부적합하다. 이곳을 100년 전 저항의 역사를 기억하는 공간으로, 식민지시기 일제의 침략을 주도한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역사는 단지 소비될 뿐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권위주의시대 국가권력에 의한 학살을 오늘날 서슴없이 왜곡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된 기억에 대한 다수의 횡포가 가능하다는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이제라도 과거의 역사를 처절하게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