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룽지를 만드는 철학
누룽지를 만드는 철학
  • 류충옥 수필가·청주성화초 행정실장
  • 승인 2019.02.1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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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류충옥 수필가·청주성화초 행정실장
류충옥 수필가·청주성화초 행정실장

 

밥통 안에서 말갛던 밥이 누렇게 뜨더니 이젠 그나마도 더 어두워졌다. 이쯤 되면 밥으로 먹기에는 비주얼도 안 되고 밥맛도 떨어진다. 그래서 점차 맛을 잃어가는 밥에 열을 더 가해 누룽지를 만들어 간식으로도 먹고 아침에 속 편하게 끓여 먹으리라 생각했다.

찬밥을 팬에 깔면 처음엔 저 잘났다고 말을 안 듣고 두툼하게 버틴다. 그래서 밥이 애꿎은 프라이팬에 떡 하니 달라붙어 탈까 봐 미리 기름을 약간 두르고 밥을 올린 후 나무 주걱으로 살살 피고 눌러준다. 빨리 만들고 싶다고 마음만 앞서서 센 불로 놓았다간 검게 타버려 먹지도 못하는 쓰레기만 만들 뿐이다. 그래서 불은 최대로 약하게 하고 살살 눌러 준 다음 물을 약간 부어준다. 그러면 뭉쳐 있던 밥풀들이 힘을 잃고 제각기 흩어진다. 밥풀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흩어지는 이때를 놓치지 말고 잘 다독거려 얇고 둥근 모양이 되도록 잡아준다. 그러면 다시 정신 차려서 살아보려는 듯 서로 달라붙는다.

밥풀들이 어우러져 같이 살아남겠다고 단단한 마음으로 각오가 서 보이면 과감히 뒤집어 반대편도 뜨거운 맛을 보여준다. 쇠도 뜨거운 물에서 단련되어야 단단해지고 쓸모 있는 연장이 되듯, 누룽지도 앞뒤로 뜨거운 맛을 보여야 누룽지로서의 바삭함을 누릴 수 있다. 만일 각오가 단단히 서기 전 덜 눌었을 때 뒤집었다간 다 부서져 버리고 만다. 모래성처럼.

그래서 타이밍은 중요한 거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늘 때를 기다려야 하는 법. 물도 100℃가 되어야만 비로소 끓는 것처럼 적절한 시간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은 오랜 실수와 경험을 통해 배운 삶의 지혜다. 무엇이든 내 맘과 똑같을 수는 없나니 사태를 잘 파악한 뒤 다음 행동을 하여야 한다.

팀워크가 다져지려면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울고 웃고 싸우고 화해하며 눈물 콧물 뒤섞여야 비로소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고자 하며 마음도 단단해진다. 마음이 단단히 서야 더 뜨거운 불이 닥칠지라도 굳건히 견디어 노랗고 먹음직스러운 누룽지가 될 수 있다.

뒤집개를 사용하지 않고 프라이팬만으로 뒤집어 보려다 아뿔싸! 일부는 찢어지고 일부는 접혀버렸다. 재빨리 접힌 부분은 피고 찢어진 부분은 붙여서 다시금 구색을 갖춰보았으나 원래의 모양을 잡기란 어렵다.

한 치 오차도 흐트러지지 않는 원형의 삶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어느 구석은 뜯기고 어느 구석은 찌그러진 채 그냥 그대로 구색 맞춰 살아갈 뿐이다. 모양이 완벽한 동그라미가 아니어도 맛만 좋다면야 성공한 누룽지 아니겠는가?

그동안 벌여놓은 많은 일을 처리하느라 분주하게 살다 보니, 나의 가정이 오래된 밥처럼 윤기도 잃고 사는 맛도 퇴색된 것 같다. 아이들도 다 커서 이제 한 집에 살날이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오래된 밥을 누룽지로 만들어 밥보다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며 나의 삶도 구수한 누룽지처럼 더 맛있고 향기나는 삶으로 만들어야겠다. 타닥타닥 누룽지 익어가는 소리에 군침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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