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아야 오른다
밟아야 오른다
  • 반영호 시인
  • 승인 2019.02.14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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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반영호 시인
반영호 시인

 

우수가 코앞에 닥치자 마음은 벌써 봄이다. 꽁꽁 얼어붙었던 골짜기의 얼음과 잔설이 녹아내려 맑은 물로 도랑을 채우면 나도 모르게 해맑은 봄의 기척에 동요되는 것이다. 냇가의 수양버들이 노릇노릇 물이 오르고 들판 저 멀리 하늘 맞닿은 지평선에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보리밭에는 청보리 싹이 파릇파릇 돋아난다. 생각할수록 가슴 벅찬 새봄의 전경이 눈에 밟히는 계절이 아닌가.

때를 같이하여 청운의 꿈을 안고 선거전에 출사표를 던진 친구가 있다. 올해는 대선, 총선, 지방선거가 없는 해라 조용할 줄 알았다. 그런데 농협, 산림조합, 새마을금고의 수장을 뽑는 선거가 있어 동네가 온통 어수선하다. 나의 둘도 없는 절친이자 문우인 친구가 음성새마을금고 이사장에 입후보했다. 8년 전 고배를 마신바 있는 친구다. 낙선의 아픈 경험을 하였으니 얼마나 고심한 끝에 결정 하였겠느냐마는 이를 지켜보는 나 또한 여간 마음 졸여지는 일이 아닌데, 선거는 마약이라 했던가? 한번 선거판에 끼어들면 발 빼기가 쉽지 않다더니 친구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친구는 그동안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불원천(不怨天).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불우인(不尤人)이라는 말을 되새겼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 것은 나를 알아주는 이는 저 하늘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 끝에 재도전의 꿈을 키워 왔단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허물하지 않는다.' 이 멋진 말과 같이 친구는 주위의 유혹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올곧은 생각으로 바른길만 걸어온 사람이다.

나도 덩달아 바쁘다. 선거는 혼자 치르는 것이 아니다. 부모·형제 가족 친지는 물론 가까운 이웃이며 친구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힘들다. 그렇다고 도와준답시고 선 듯 나서는 것도 용이치 않다. 지역사회라는 것이 이리저리 걸리는 것도 많고 살아가는 근간이 얽혀 있으므로 반근착절(盤根錯節)이다.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갈등이 적대시되거나 충돌할 정도로 악화될 상태라면 곤란하다. 이번에 출마한 후보자 4명 중 누구와도 나와 걸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어느 쪽을 응원할 수도 가만히 있기도 멋쩍은 진퇴무로에 서 있다. 그래서 지방선거가 더 힘들다.

그런데 이사장 선거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부이사장직에 입후보한 후배가 있어 더욱 곤혹스럽게 한다. 이사장은 보수라도 있지만, 부이사장직은 무보수다. 창사 이래 부이사장직을 놓고 선거를 치른 바 없었다. 현 부이사장은 80을 넘긴 분으로 10년 이상 그 자리를 지켜온 그는 아들 내외가 출세하여 중앙부처 쪽의 요직 생활에 아쉬움이 없을뿐더러 금고의 발전에만 정열을 다 바쳐 온 욕심 없는 사람이다. 지역사회의 대선배인 그와 굳이 경선을 하여 그 자리에 앉고 싶은지. 설득을 해 보았지만 `그분 할 만큼 했잖아요?'라는 말로 설득은 수포로 돌아갔고 그분은 결국 후배와의 싸움을 원치 않기에 불출마로 막을 내렸다.

그런 게 선거다. 밟지 않고서는 올라서지 못한다. 당장의 영예가 아니더라도 다음에 더 큰 무엇을 위해서는 한 줄 명함에 새길 이력이 중요한 사람들. 이 좁은 지역에서 선후배가 통하던 시대는 끝났나 보다. 현재 이사로 등록돼 있는 나도 생각이 깊어진다. 20년 전부터 나를 도와 사회단체를 이끌게 했던 그가 나보다 한자리 위인 부이사장직에 앉게 되었으니 `할 만큼 했잖아요?'소리 나오기 전에 정리해야겠다.

봄이 오면 보리밟기를 한다. 언 땅이 솟아오르면서 뿌리가 들뜨므로 뿌리의 안착을 위해 밟아주어야 한다. 밟는 쪽이 아니라 밟히는 쪽이 뿌리가 활착되고 튼튼한 보리가 되는 이치와는 다른 의미로 밟아야 올라서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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