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여름
아들의 여름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19.02.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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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까치설날에 비가 내렸다. 비는 봄을 머금고 오는가. 마침 입춘이어서 제대로 이름값을 하는 단비다. 사람들은 비를 반긴다.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추위를 몰아가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 이 비가 그치면 아마도 봄이 잰걸음으로 올 것이라 믿는 눈치다.

올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지 않아서 가물다. 대지가 메말라서 과수들이 갈증으로 수피가 갈라진다고 한다. 농부들은 가을이 되어 수확을 끝내면 일손을 멈추고 마음과 몸이 다 편해지는 줄 알았다. 봄이 올 때까지 쉼표를 찍는 줄 알았다. 겨울에도 목이 말라 하는 나무들을 보면서 그들은 애를 태우고 있었다.

춥다고 몸을 움츠리는 나는 얼마나 게으른가. 농부들은 기지개를 켜고 들로 나섰다. 밭에서는 벌써부터 전지를 하느라 바쁘다. 농사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조용히 추위를 견디던 생명이 날숨을 내쉬며 깨어나고 있었다. 한 발 더 먼저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발을 묶어두는 겨울은 길다. 나에게는 사계(四季)가 없어지고 여름과 겨울로 나누어진다. 나이가 들수록 겨울은 더 늘어나고 지루하다. 해가 갈수록 가속도가 붙어 빨라지는 시간이 겨울에는 더디다. 지쳐갈 때쯤 돌아오는 여름은 쏜살같다.

내 인생의 여름도 그랬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시작도, 끝도 모르게 휩쓴 장마였다. 물이 갑자기 불어나 순식간에 쓸고 간 급류였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모르게 혼을 쏙 빼놓았다. 가다듬고 보니 가을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한때의 뜨거운 정열을 펼칠 사이도 없이 젊음은 가버리고 대신에 거울 속에 중년의 여자가 있다.

그녀에게는 남편과 아들이 한 명 있다. 서른이 된 아들은 아직도 공부하고 있다. 오매불망하는 바라기지만 자주 보지 못한다. 휴일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연구실에 박혀 지내느라 시간이 없는 걸 뻔히 알면서 부모를 보러 와주지 않는다고 나무랄 수가 없다. 장성한 자식에게 무엇 하나 해줄 게 없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이 최선이다.

아들은 지금 인생에 있어 여름을 보내는 중이다. 태양이 제일 뜨겁게 내리쬐는 한여름을 견디고 있다. 집안이 넉넉하여 유학을 가는 친구가 속으로 얼마나 부러울까. 제대로 된 뒷바라지가 없어 혼자서 무더위와 정면으로 맞서 싸워야 하는 열악한 조건이다. 그래도 불평을 내비치지 않고 꿋꿋이 갈 길을 가는 모습이 흐뭇하면서도 짠하다.

부모로서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해 남들보다 더 고생하는 것 같아 항상 미안하다. 그 미안함에 잠시도 기도의 끈을 놓지 못한다. 늘 아들이 내 기도의 발원이다. 강더위와 싸우며 이겨낸 하루는 쌓여서 그의 인생이 될 터이다. 긴 여정이리라. 바로 앞은 안개가 자욱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가다 보면 흐려진 길이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리라. 이 힘든 여름을 잘 견디고 이겨내기를 응원하는 것이다.

한낮 햇살의 꼬임에 농막 주위에 있는 농로로 산책을 나섰다. 영상 기온이 느린 걸음을 하기에 좋은 날이다. 쏟아지는 햇빛이 꽁꽁 언 땅을 무장해제 시켜 녹아내린 길에 발자국이 또렷이 찍힌다. 걷고 있는 나의 시선에 푸릇푸릇한 것들이 들어온다. 검불 속에서 제법 올라와 있는 풀들이다. 2월 초인 겨울인데도 새싹에는 마른 덤불이 봄의 환경을 만들어 주었나 보았다.

`요, 이쁜 놈'추위를 이겨내고 생명의 부활을 알리는 새싹이 대견하여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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