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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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19.02.1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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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정명숙 수필가

 

빈틈없는 눈초리가 매섭다. 짧은 머리는 반백으로 깔끔하다. 마른 몸이지만 강단도 있어 보인다. 자존심도 남달랐을 것 같은 노인은 배설물이 조금이라도 기저귀에 묻어 있으면 참질 못하고 간호인을 부른다. 칠십 대 중반을 넘어서며 치매란 병명을 달고 노인병원에 입원해 계신 시어머니 옆자리에 두 달 전 새로 입소하신 분이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면 덩달아 몸도 허물어지는 노인보다 몸이 먼저 허물어진 그분은 정신적인 충격 탓인지 예민해 보였다.

6인용 병실에 계신 분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80대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삶이 꺾여 거동을 못하거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겉모습만 본다면 그분도 비슷했다. 병문안을 갈 적마다 다른 환자들과 다른 면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무심코 지나쳤던 병상 카드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이가 믿기지 않아 몇 번을 반복해서 보고 또 봤다. 116세라는 나이를 난생처음 접해보는 나로서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다른 환자들보다 삼십 여년을 더 사셨으면서 인지능력은 훨씬 높아 더욱 놀라웠다. 한 세기를 훌쩍 넘기는 세월을 지나면서 찬 서리 내리고 거센 비바람 맞으며 수없이 벼랑 끝에 섰을 터이다. 꼿꼿하게 견디며 인생길을 걷게 한 비결은 무엇일까.

칠 년 전이다. 팔순의 친정 부모님과 작은아버지, 고모 두 분을 모시고 싱가포르로 여행을 갔었다. 일정상 하루를 인도네시아 바탐 섬에서 일박하게 되었다. 배를 타고 섬에 도착해 이동하는 차 안에서 현지 가이드가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오래 살고 싶어 해요. 칠십이 넘고 팔십 세까지 사는 사람이 많은데 무얼 하면서 지내나요. 딱히 할 일도 없잖아요.”

십 대 중반을 넘어서면 결혼해 자식 낳아 그 자식을 결혼시켜 손주를 봐도 사십대고 오십대가 넘으면 사망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란다. 할 일도 없거니와 의료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니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는 자기네 나라와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장수하는 한국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단다. 남의 나라 노인들을 못마땅해하는 노골적인 말투가 거슬렸다. 어렵게 부모님 형제분들을 모시고 관광 온 사람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그때, 팔순이셨던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나는 몹시 기분이 상해서 부모님께서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또 살아가고 계신지를 조목조목 나열하며 따지고 말았다. 그 가이드가 지금의 116세 할머니를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구정이 지나면서 올해 나이가 몇이냐 묻는 이들이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난감해진다. 선뜩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해를 거듭할수록 내 나이가 점점 낯설어지는데 할 일은 넘쳐난다. 병환 중인 시부모 때문에 늘 긴장해야 하고 자식들의 치다꺼리도 진행 중이다. 꿈은 사그라질 줄 모르고 갈 곳도, 만나야 할 사람들도 많아 시간을 아껴 써야 한다. 가끔은 나이도 잊는다. 116세의 할머니께서도 건강한 몸으로 바쁘게 살다 보니 나이가 쌓여가는 것을 잊었던 것은 아닐까. 오랜 세월 자손들을 위해 헌신한 삶인데 그 자손들은 그분을 위해 얼마만큼이나 헌신해 줄까. 무성영화 같은 지난 삶이 병상 위에 내려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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