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 김복동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 김복동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9.02.11 2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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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연지민 부국장
연지민 부국장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일제 강점의 핍박에서 벗어나는 신호탄이 되었던 3·1운동은 민중운동으로 확산하면서 나라 잃은 국민에게 희망의 불씨가 되었던 역사적 사건이다.

온 국민이 염원하던 광복은 3·1운동이 일어난 후 29년이 지난 다음에야 이뤄졌지만,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는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100년 후 오늘, 그 의미를 담아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추진하고 있다. 전국의 지자체별로 기념행사가 펼쳐진다고 하니 광복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문화행사가 연출될 전망이다.

이처럼 기념일을 앞두고 굵직한 행사 소식이 들려오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씁쓸한 역사 이면도 두드러진다. 1세기가 지나도록 청산하지 못한 한일관계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생존자들의 상처 난 마음을 보듬지 못한 채 시간만 낭비해 왔다. 고령의 생존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등지고 있지만,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 모두 그녀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주기엔 역부족이다.

위안부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반일 감정도 악화되고 있다. 짓밟힌 영혼들을 진심으로 위로하기는커녕, 돈으로 때우고 할 일 다했다는 식의 일본 정부의 행태는 더 깊은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

가해자가 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는 사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고발해 세상에 알린 김복동 할머니가 지난달 28일 93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그녀의 죽음이 던진 잔잔한 파문은 3.1운동 100년을 기념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의 밑바닥까지 경험해야 했던 그녀가 좌절을 딛고 스스로 상처를 극복하며, 인권운동가로 우뚝 선 용기와 실천이 전하는 감동이기도 하다.

1940년 당시 14살이던 소녀 김복동은 일본군에게 속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이후 8년 동안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으로 끌려다니며 일본군 성 노예로 고통받다가, 1948년 8월 15일 광복 후에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 여성으로, 인간으로 꼭꼭 숨기고 싶었던 과거였지만 일본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1992년 피해 사실을 고발하였고, 1993년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공개 증언하며, 국제적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는 나비기금을 설립해 전쟁이나 분쟁지역의 어린이들을 위한 장학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지난해는 암 투병 중에도 1인 시위로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를 촉구했으며, 일본정부의 지원이 끊긴 재일 조선학교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마지막까지 이웃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과거를 스스로 치유하면서 상처를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평범한 소녀가 역사의 소용돌이를 지나 다시 거듭나기까지 주변의 편견과 시련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처를 상처로만 남기지 않고 아름답게 꽃피우는 힘을 보여준 김 할머니의 정신은 그 어느 독립운동가보다 빛나는 실천이었다.

김복동 할머니의 별세 소식에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궤변의 기고문을 게재하는 등 좁혀지지 않는 한일관계를 드러냈다. 이는 3·1운동 100년이 되는 지금도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 역사의 발목을 잡고 있는 친일 청산을 위해서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이름은 김복동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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