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영화관
하늘 영화관
  •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19.01.31 18: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하늘로 올랐다. 육중한 몸체, 시속 1000㎣로 나는 비행기 안에서 신기한 세상이 시작되는 중이다. 하늘에 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 내부의 기운조차 편안했다.

그러나 도착지까지는 무려 열 시간을 가야 한다니 약간은 염려스러웠다. 처음이 아니건만 그래도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가슴속에 들뜬 보자기 한 장 지니고 가는 것처럼 설렌다.

승무원이 연신 오가며 편의를 제공한다. 갖가지 음료며 따끈한 식사까지 구미를 충족시켜주고 있어서 좋다. 나른하던 일상이었는데 특별한 휴식이라 생각하니 여유로움까지 더했다.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 그것은 잊었던 나를 발견하는 길이기도 하며 삶의 의미를 확장하는 기회이기도 해서 반가울 뿐이다.

지상 최고의 고도 위에서 새가 된 것 같다. 어깨 위에 날개는 없지만, 창공을 가르는 기분이니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인간의 기술로 만들어진 기기와 문명의 혜택을 지금 충분히 누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는 더해갔다. 눈앞의 모니터에서는 도착지까지 시간이 얼마 남았으며, 밖의 기온은 섭씨 몇 도이며, 땅에서는 고도가 몇 미터인지 자세히 알려주고 있기에 지루함도 줄어들었다.

이어폰을 끼고 영화를 본다. 그것도 한국어로 제공되는 다양한 제목을 고른다. 사실 나는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감상할 만큼 삶이 여유롭지가 않은 편이었다. 휴가의 맛이 이런 걸까. 느긋하게 빠져들어 가는 순간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느낌이다. 좁은 좌석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찌 보면 흔하고 어찌 보면 드문 일이라 해도 나만의 시간을 즐긴다는 자체가 좋다.

노트북이란 제목의 영화 줄거리가 흥미롭다. 평소에 한 번 보았으면 했던 영화인지라 처음부터 낯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노인의 치매를 보여주고 있기에 열심히 빠져들었다. 치매로 인한 가족 간의 아픔과 단절을 말하는 것이 주된 장면이었다. 끝없이 극복하는 자세, 최고의 사랑은 영혼을 일깨워 주는 것이라는 주인공의 대사가 영화의 모든 내용과 맞물려 뭉클키까지 했다.

공중에서 보는 영화의 맛이 색달랐다. 하늘에 설치된 거대한 영화관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과학의 발달 속에 편승하여 또 다른 편리를 취하고 있으니 세상을 향한 시야가 조금씩 넓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시간은 그렇게 유유히 흐르고 목적지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늘 영화관의 막은 자연스레 멈추어졌다.

드디어 동유럽 땅에 다다랐다. 하늘 영화관의 다른 후속편이 이어진다 생각하며 즐기기에 들어갔다.

중세의 고고했던 흔적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곳에 서려 있는 중후한 역사가 금방이라도 되살아와서 말을 건네는 듯하다. 수백 년 동안 보존하며 지켜온 국민성을 보기에 충분했다.

특이한 것은 우리나라보다 낮이 짧다는 거였다. 기우는 해만큼 허락된 여행의 여백들이 조금씩 자리를 좁혀가면서 아쉬움을 더해 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슬로베니아, 블레드호수의 경관이라 말하고 싶다. 인간과 신의 영역이 합해진 곳을 둘러보는 기분이었다. 목선을 저으며 그곳의 자연과 전통을 지키는 사공의 눈망울이 아직도 선하다.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한 여운이 가슴에 밀려든다. 하지만 하늘 영화관에 다시 입장하여 어디론가 떠난다 해도 그때보다 오늘이라는 현실을 더 새로운 여행이라 여기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