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딸에게
1월의 딸에게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1.2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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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방학을 맞아 집에서 쉬고 있는 작은 딸과 생선구이를 먹으러 갔다.

버릇처럼 가시를 발라주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은 입을 열어 “아빠! 이제 제가 알아서 먹을께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언제까지 아빠가 생선살을 발라주실 수 없잖아요.”

순간 만감이 교차한다. `어느 사이 스스로 잘 자라서 내 걱정을 해주고 있구나'하는 대견함과 더불어 `벌써 내 품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준비하고 있구나'라는 서늘함. 그리고 `아! 이젠 내 도움이 별로 필요하지 않을 만큼 (내가)쇠락하고 있구나' 하는 쓸쓸한 느낌이 동시에 짓궂은 파도처럼 가슴에서 울렁거린다.

얼마만의 느긋함일까. 입시지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초·중·고 시절 12년 동안 매몰된 것도 모자라 서울로 떠난 이후 대학 3년이 지나도록 주말에도 잘 내려오지 못하는 사정임을 뻔히 알면서도 문득문득 서운함을 지울 수 없었다. 힘겨운 학업과 고단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느라 방학이면 더 바쁜 나날들. 무슨 까닭인지 이번 겨울방학에는 집에서 푸욱 쉬며 미뤄왔던 책이나 읽겠단다.

모든 세상이 저마다 조급증의 상태를 악화시키고, 청년이 위태로운 헬조선의 나라에서 취업에 대한 압박이 갈수록 조여 올 것이다. 짧지 않은 방학을 아르바이트와 취업, 그리고 불확실한 앞날에 대한 생각을 뒤로 미루고, 하고 싶었으나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을 하겠다는 것이 이미 커다란 용기가 되어버린 나라에 살고 있구나. 내 막내딸아!

1월은 새로 오는 것들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기쁘게 맞이하는 계절. 그렇게 맞이하는 시간은 서두르거나 조급해서는 안 될 일인데, 어느 새 찬란해야 할 날들은 흔적 없이 흘러가고 단 하루만 남겼을 뿐이다.

100년을 말하면서 우리는 10년 앞을 반성하지 않는다. 최저임금 인상과 탄력근로, 저녁이 있는 삶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다시 토건공화국으로 급격히 회군하고, 소득주도성장을 말하면서 대기업에 읍소함으로써 촛불 시민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를 둘러싸고 지역균형발전과 지역 경기부양의 호재로 우매한 찬양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무분별한 토건사업의 남발을 막고 공공투자사업의 효율성을 담보하기 위한 제도적 견제 장치가 무시되는 일은 무심했던 `삽질'의 본능을 되살리는 일이며, 앞으로 예타를 무력화하는 선례가 될 것이다. 그렇게 예비적 기능이 마비된 채 강행될 토건의 욕망은, 실패하더라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악순환이 되어 이 땅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길 것이다. 더 끔찍한 일은 회복과 극복의 부담을 후세에 고스란히 전가하는 것이며, 질서의 파괴와 사회적 조급증,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랄함을 사람들의 정서로 남겨둘 것이다.

우리는 개혁을 희망하고 있다.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는 개혁은 구호와 의지에 앞서 개혁해야 할 대상과 구조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회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으로서의 구조적 변화는 다수의 시민이 원하는 공동체적 가치를 지니는 의지를 확보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딸에게 예타와 토건 공화국을 한탄하는 것이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이번 정부만큼은 초조함에서 벗어나 당당한 개혁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부드럽고 느긋하며 평안한 모습을 찾을 수 있게 초심을 잃지 않기를... 차마 손을 놓지 못하겠다. 그리하여 내 딸이 살아갈 세상이 진정한 사람다움으로 넘쳐 나길 소망한다.

딸아! 어쩌면 이 1월이, 그리고 이번 겨울이 우리가 한 집안에서 함께 있는 긴 인연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 너는 드물게 나를 찾을 것이고 세상은 너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조급함과 떨리는 앞날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고 다시 세상을 나아가는 내 딸에게 이런 느림과 느긋함의 용기가 얼마나 소중할 것인가.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 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이성복, 서해. 부분>

문득 딸과 함께 서해바다 지는 노을을 보고 싶은 새로운 1월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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