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에서 만난 `황금 가지'
부다페스트에서 만난 `황금 가지'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19.01.2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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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돌들과 어우러진 낮은 나무 숲, 그 뒤로 보이는 높은 산꼭대기에는 눈과 석회암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동유럽의 겨울 숲을 달리는 중이다. 이른 산책을 나온 구름은 아침 햇살에 불그스레 몸을 물들이고, 하늘은 추웠는지 파랗게 얼어 있다. 이국의 자연 앞에 이방인들은 넋을 잃은 지 오래다.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눈 내린 들판과 그 끝에 펼쳐진 하늘의 풍경, 그동안 우리들이 보아온 시골풍경이 아니다.

이맘때면 비닐하우스가 온 들판을 채우는 우리나라의 시골풍경을 보다가 이렇게 텅 빈 들판을 보자니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농한기라는 것은 옛말이 되어버린 우리나라 겨울 농촌은 이렇게 추운 날에도 비닐하우스에 각종 채소를 키우고 봄에 내다심을 고추 모종을 키우느라 농부들은 바쁜 계절을 보낸다. 부지런한 농부들 덕에 마트에는 계절을 잊은 채소와 과일이 언제나 진열대를 채운다. 그런데 유럽의 겨울 시골 마을은 어찌 된 일인지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긴 이동 시간 버스는 밤을 만나는 일이 잦다. 그런데 간혹 보이는 집들에서는 불빛도 희미하다. 그런 불빛도 흘러나오지 않는 집도 많았다. 그 흔한 가로등도 없다. 그래서일까. 밤하늘의 달도 별도 너무도 가깝게 내려앉아 있다.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도, 어느 나라는 미세먼지로 골치를 앓고 있는가 하면 어느 나라는 청명한 하늘과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그 나라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서 오는 차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공기가 맑아서일까. 차창 밖으로 지나친 나무에서 우연히 발견한 겨우살이는 내게는 충격이었다. 그동안 겨우살이는 깊은 산중의 높은 참나무에서만 산다고 알고 있었다. 예전에 덕유산의 산 중턱에서 만났던 겨우살이는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그런데 겨우살이를 얹고 있는 나무는 동유럽의 한적한 숲은 물론이며 도시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도시 곳곳에서는 겨우살이를 만나는 게 어렵지 않았다. 나무들에 겨울은 휴식의 계절이다. 부다페스트의 도시공원에는 많은 나무가 기도하듯, 그렇게 조용히 묵상하고 있다. 하지만, 죽은 듯 서 있는 가지마다 겨우살이는 무성하게 피어 새들과 이방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지나간 계절은 겨우살이에 죽은 계절이었을까. 푸른 나무들의 잎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잃었던 그 순간을 회복하려는 듯, 나뭇가지마다 둥그런 둥지를 달고 있다. 햇살에 잎이 반짝인다. 유럽에서는 겨우살이를 `황금 가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로마의 신화에서도 등장하는 겨우살이는 유럽인들에게는 신성시 여기는 나무다. 땅도 물도 필요 없는 나무, 이러한 겨우살이가 마력이 깃들어 있다 하여 신성한 의식에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겨우살이가 사는 방식을 보면 그리 탐탁스럽지는 않다. 자신의 숙주가 되는 나무의 영양분을 빨아 먹고살기 때문이다. 물론 겨우살이는 스스로 광합성을 하기 때문에 숙주가 되는 나무에 큰 피해는 주지 않는다고도 한다. 하지만 허락도 없이 어느 날 자신의 몸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도 모자라 나무의 살을 뚫고 푸른 가지를 뻗어내는 겨우살이가 숙주가 되어버린 나무는 무슨 죄란 말인가. `황금 가지', 이 말도 인간의 잣대로 겨우살이의 삶을 칭송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겨우살이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생물의 삶의 방식은 다르다고, 그러니 자신의 삶도 정당하며 가치 있다고. 그런데 왜 나는 황금가지를 품고 있는 저 나무가 안쓰러워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저마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이 유럽의 사회의 모습을 `황금 가지'는 내게 보여 주고 있었다. 과연 갇혀 있던 내 안의 의식도 단단한 나의 나무의 피를 뚫고 황금 가지로 피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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